21세기판 소작농

  • 입력 2016.07.08 11:51
  • 수정 2016.07.11 09:19
  • 기자명 안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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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안혜연 기자]

여태껏 종이봉투로 감싸지 못한 사과열매가 부지기수였다. 유기농의 소신을 지키고자 투자한 세월만큼이나 과수원은 갖가지 종류의 풀들로 그득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폭신한 느낌이 발끝을 통해 전해졌다. 장대같은 장마비가 쏟아지던 지난 4일, 한연수씨는 충북 단양 자신의 과수원에서 미처 싸매지 못한 사과를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2년 전 자신도 모르게 진행된 땅 매매계약에 의해 사과나무를 모두 뽑아야 할 처지에 놓인 순간부터 그는 일에 의욕을 잃었다. 땅을 임대하며 맺은 계약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임차농이라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그는 헤매고 있다. 한승호 기자

"사과나무 뽑으라" 땅 주인 통보 앞에 무력한 임차농

충북 단양군에서 10년 동안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를 길러오던 한연수씨는 재작년부터 땅 주인 A씨로부터 사과나무를 뽑아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사건은 재작년 A씨가 과수원 땅의 일부를 한씨의 이웃 B씨에게 팔아버리면서 시작됐다. 2014년 한씨의 사과농원 옆으로 이사 온 B씨는 집을 짓기 위해 땅 측량을 하던 중 과수원의 일부가 자신의 땅에 속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A씨와 B씨 간 땅 소유권을 놓고 분쟁이 일었고, 결국 합의에 따라 A씨는 B씨에게 해당 토지를 팔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씨는 아무런 정황을 알지 못했다. A씨는 땅을 판 후에야 한씨에게 이를 알리면서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사과나무를 뽑아야 겠다”고 통보했다. 한씨는 나무를 뽑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A씨는 사과농원 간판에 나머지 땅도 모두 팔아버리겠다는 현수막을 걸었다.

하루는 B씨의 가족이 과수원을 찾아와 작업을 하고 있는 한씨 뒤에서 대뜸 “사과나무 언제 캐내요”라고 물었다. 임차농을 위한 배려는 기대할 수 없었다.

법적으로 한씨는 B씨의 소유가 된 땅의 사과나무에 대한 보상은 한 푼도 받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B씨가 직접 나무를 캐내면 한씨가 그 비용까지 물어야 한다.

10년 전 한씨는 8,800㎡에 해당하는 A씨의 땅을 20년 동안 임대한다는 농지 임대차 계약서를 썼다. A씨의 구옥을 구입하고 여러 다랑이로 돼 있는 땅을 경지정리 하는 조건으로 12년은 땅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그 이후엔 주변 시세에 준해 임대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계약서에는 ‘토지를 매매할 경우 임차인의 동의를 구하고 상대방의 동의 없이 당사자 일방으로 이를 해지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농지 임대 관련 법적 조항이 없어 계약서는 휴지 조각이 돼 버렸다.

한씨가 사과나무를 더욱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유기농법으로 사과나무를 기르기 위해 지금까지 농원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기 때문이다. 유기농사 중 제일 어려운 게 과수라고 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한씨는 나무를 심은지 8년째 되던 지난해 첫 수확의 결실을 맺었다. 사과나무를 뽑으면 지금까지 가꾼 땅, 나무를 모두 잃게 된다.

한씨는 “몇 년 전 무농약 인증을 받고 올해 유기농 인증 절차를 밟는 중인데 농사 의욕을 잃었다. 원래 지하수 일을 좀 했는데 작년부터 과수원에서 소득이 나오면서 일을 정리해 지금은 소득이 전혀 없다. 상가나 주택은 소유권이 바뀌어도 임차를 인정해 주는데 농지는 그렇지 않아서 문제”라고 말한다.

통계청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 임차농가 비중은 전체의 59.6%에 해당한다. 절반이 넘는 농민들이 땅을 임대해 농사짓고 있는 상황이지만 임차농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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