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라운드 반대 투쟁

  • 입력 2016.06.26 20:04
  • 수정 2016.06.26 20:1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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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농민들은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해괴한 언어들과 싸워야 했다. 처음으로 농민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단어는 우루과이라운드(UR)였다. 남미 어디쯤에 있는 나라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왜 우리나라 농민들의 삶과 연결되는 것인지, 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 농민들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공부를 해야 했다. 온몸으로 세계화의 물결을 맞게 된 것이랄까. GATT, UR, WTO, FTA 등등 농민들이 농반 진반으로 ‘머리에 쥐가 난다’고 할 정도로 복잡다단하고 끊임없이 생존권을 위협하는 고달픈 세상이 온 것이었다.

▲ 1994년 2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UR 재협상쟁취, 국회비준거부와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에서 우루과이라운드 반대를 외치며 시위에 나선 농민들이 행진하고 있다.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때까지 세계의 무역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이라고 불리던 GATT에 의한 것이었다. 1948년 이후 지속되던 가트체제는 국제 경제교류가 다양화되면서 종래의 규칙으로는 감내할 수 없는 서비스무역, 해외투자, 지적소유권의 국제적 이전 등 새로운 규칙이 요구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 통상마찰이 잦아지고 보호주의 움직임도 강화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교섭이 필요하였다.

미국의 절대적 우위에 기초한 국제경제질서가 붕괴되어,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이 미국, 일본, 유럽공동체 등으로 다극화되었고, 특히 1980년대 들어 미국은 자국의 농업공황, 제조업 쇠퇴, 서비스산업 팽창이라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경상수지 적자에 직면하여 새로운 무역질서 구축을 시도하게 되었다. 즉 농업·서비스산업 및 첨단기술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하여 세계경제에 대한 패권을 회복,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 대자본의 요구에 의한 새로운 무역질서 재편과정이 우루과이라운드였고 이를 통해 GATT체제는 WTO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사지로 내몰리는 농업

우루과이라운드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2년에 들어서였다. 이미 86년에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협상은 여러 차례의 고비와 공백기를 거쳐 90년부터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국과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실제로 자본은 협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장밋빛 선전을 하였기 때문에 세계의 일반 민중들은 협정이 몰고 올 파탄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정과 세계무역기구의 설립으로 전 지구적 부와 번영이 찾아오고 모든 회원국 국민의 복지가 강화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각국 국민경제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 그리고 환경을 대가로 하여 초국적기업들을 위한 시장개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국농민회나 농어촌사회연구소 같은 선진적인 조직에서는 이미 협상에 대해 파악하고 90년부터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고 대책위를 구성하고 있었다. 전농은 ‘제2의 을사조약 UR협상을 반대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농협에서 주도한 ‘쌀 수입 개방 반대 서명운동’에는 1,300만 명의 국민이 참여했고 전국의 대학교수 및 강사, 연구소 박사 3,000여 명이 참가해 UR을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다.

하여튼 UR 협상 내용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사태였다. 실제로 협상이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농산물 때문이었다. 농산물협상은 각 나라가 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특성과 협상 당사국 사이의 기본적인 시각차이가 컸다. 결국 1991년에 소위 G7 정상들이 합의한 내용은 모든 수입제한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폐지, 영농자금 융자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이었고, 이는 곧 한국 농업의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을 지키겠다던 김영삼의 약속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UR 협상으로 쌀 시장 개방 프로그램이 작동되기 시작하였고 농민들은 마침내 사지로 내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 그 이전 노태우 정권 때부터 정부는 일관되게 쌀 시장 개방은 없다는 입장을 수없이 표명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농업뿐 아니라 산업계 전반이 치열한 국제무역 경쟁에 내몰리면서 결국 허약해진 경제체질은 몇 년 후의 국가부도사태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UR 협상 타결 소식은 농민과 도시민을 불문하고 커다란 충격이었다. 아직 농민이 사회의 당당한 계급으로 자리하고 있을 때였고 사회 분위기도 지금과 달리 농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결국 건국 이래 최대라는 농민집회가 일어나게 된다.

투쟁의 전개

1993년 2월 15일, 동국대학교에서 ‘UR협상 거부 및 쌀 전량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농민들과 학생, 시민 등 2만여 명이 참가한 이날 대회는 UR협상 거부를 내걸고 열린 최초의 대규모 대회였다. 3당 야합으로 김영삼이 당선된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딛고 모인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이 날 채택한 결의문에서 ‘농가소득의 40%를 차지하는 쌀 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600만 농민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뒤 새로 취임하는 김영삼에게 취임식 전에 쌀 시장 개방을 반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요구했다. 이 날 대회에는 유럽과 미국의 농민대표도 참석했는데 이들은 한국농민들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미국 대농들만의 이익을 위한 우루과이라운드는 유럽은 물론 미국의 소농까지도 몰락시킬 것이며 지구 환경 보전을 위해서도 쌀농사를 늘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들은 대회가 끝난 후 오후 4시부터 동국대를 출발해 장충단 사거리와 동대문, 동숭동까지 평화 행진을 벌이며 시민들에게 결의문을 나누어주는 등의 선전활동을 벌였다. 이 날 대회는 경찰과 별다른 충돌이 없이 끝났지만 사태는 지속적으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농은 단식투쟁과 토론회, 지역 대회 등을 통해 꾸준히 투쟁역량을 높여갔고 11월에는 쇠사슬로 몸을 묶은 농민들이 청와대와 국회로 진격하는 처절한 투쟁을 벌이고 전원 연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단군 이래 최초로 187개 시민·사회단체와 농민단체, 학계가 연합하여 ‘우리 쌀 지키기(UR 반대) 범국민 비상대책회의’가 꾸려졌다. 12월 8일에 전농에서는 농산물 수입 개방에 앞장선 정부관계 인사 5인에게 ‘계유 5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나라를 일제에 팔아넘긴 을사5적에 빗댄 이들의 이름은 민자당 대표 김종필, 국무총리 황인성, 부총리 이경식, 농림수산부장관 허신행, 외무장관 한승주였다. 농민을 팔고 농업의 기반을 붕괴시킨 것은 나라를 팔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사실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대응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결국 총리와 장관 두 명을 경질하는 것으로 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2월 1일, 건국 이래 최대의 농민대회가 열린다. 물론 이후에 더 큰 규모의 대회도 열리지만 당시까지는 그랬다. 많은 농민운동가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날의 대회는 농민들의 분노와 그에 연대한 시민들의 힘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9개 농민단체 회원과 학생, 시민 등 4만여 명은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UR 재협상쟁취, 국회비준거부와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서는 8개 항의 주요 요구사항이 발표되었는데, 대통령이 협상 무효를 선언할 것과 이행계획서 제출 중단, 사대매국의 내각과 민자당 지도부 사퇴, 거국내각구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태를 국가비상사태에 준한다고 본 것이다.

집회를 마친 농민들은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전경버스와 경찰 순찰차를 불태우는 등 밤늦게까지 종로, 청계천, 광화문, 시청 앞 등을 오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종로 2가에서 5가까지 왕복 8차선 도로가 완전히 점거되었고 지나가던 시민들도 박수를 치며 농민들을 응원했다. 경찰이 행진을 막자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대는 오후 5시 30분쯤 청계2가 삼일빌딩 앞길에 세워져 있던 전경버스 3대중 1대를 습격, 불을 질렀으며 나머지 버스 2대의 유리창을 모두 깨뜨렸다.

이어 오후 6시 40분쯤에는 인근 청소차 1대가 불탔고 취재 중인 KBS 차량의 유리창을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깨뜨렸다. 같은 시각 시청 앞 광장에 집결한 1만여 명은 광화문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다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두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날 시위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다.

또 시위대 1,000여 명이 청계 2가 고가도로 아래에서 전경 100여 명을 무장해제 시키고 이들로부터 빼앗은 방석모, 방패, 방독면 등 진압장비를 빼앗아 불을 질러 종로, 청계천 일대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후 9시 25분쯤에는 시위대 10여명이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앞에서 경찰 순찰차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서울 도심은 최루탄과 검은 연기로 뒤덮여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시위는 밤 10시까지 격렬하게 이어졌고 일부는 동국대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기나긴 싸움의 한 고개였다. 소위 문민정부가 닦아놓은 세계화라는 제국주의와 자본의 미친 질주에 맞서 싸울 긴 시간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땀 흘려 농사지으면서 농민들은 또 힘겨운 투쟁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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