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약장수와 할머니

  • 입력 2016.06.24 15:49
  • 수정 2016.06.24 17:09
  • 기자명 심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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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문희(전남 구례군 마산면)

저녁 식사도 미처 먹지 못한 할머니들이 그래도 나름 씻고 치장하고 회관 앞에 삼삼오오 모여든다. 하루 종일 논으로 밭으로 곯아떨어질 만도 한데 이 밤중에 어디를 가시려고 저러시나. 얼핏 보면 어디 거창한 곳 저녁식사 자리에 가시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겨울 면 소재지 낡은 창고를 임대해 들어온 만물장사 굿판은 골골이 사는 할머니들에겐 그 옛날 장판을 돌던 서커스단 같은 걸까? 별거 없는 것 같아도 할머니들을 봉고를 이용해 실어다 나르고 밤이 깊을 즈음 집에 모셔다드리기까지 하니 맨날 보는 연속극보다 더 좋으신가 보다.

집집마다 마루며 부엌이며 그동안 하나하나 사 모으신 화장지며 수세미, 그릇들이 즐비하다. 무엇이 그녀들을 저녁마다 그곳으로 모이게 하는 걸까 궁금하기 그지없어 한 번 따라나서고 싶지만 선뜻 내키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가 볼걸’.

이런 거 다 불량이에요. 금방 깨지고 고장 나 버려요. 화장지 먼지 날리는 것 보세요. 이런 약 잘못 먹으면 더 큰일 나요. 내가 보기엔 안 되는 것 투성이고 사기꾼처럼 보이는데….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거기 가서 손뼉 치고 노래하고 웃다 보면 어느새 하루의 피로가 사라져 버리는구먼”. “늙은 나랑 이렇게 재미지게 놀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면의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사기꾼을 쫓아낸다 하니 다들 성을 내신다. 우리는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자발적인 것이라고 하신다. 할아버지들께 지청구를 듣더라도 집에 들어오는 손엔 자질구레한 게 꼭 들려 있었다. 물론 그 굿판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들은 안 계신다.

이쯤 되면 누구도 대놓고 말리지 못한다. 내 놀아주는 사람이 파는 그것이 불량이든 아니든 화장지 하나 못 사것냐 하시는 분들께 아무도 토를 달 수 없다. 그녀들은 외로웠던 것일까? 1인 가구(독거 할머니), 2인 가구(가부장적인 할아버지), 3인 가구(도시에서 맞벌이하는 자식의 손주) 등등 다양한 가족 형태에서 끊임없이 희생이 요구되는 어머니라 불리는 그녀들. 그녀들이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제끼고 목이 쉬도록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는 마법의 주술약을 몰래 먹이는 걸까?

유행처럼 약장수들은 철마다 바뀌지만 오면 오는 대로,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그녀들의 삶은 지금껏 여전하기만 하다. 명절 때 자식 기다리듯 약장수를 기다리는 이는 없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셈이다. 여전히 봄이 오면 씨앗 뿌리고 가을이면 곡식 거두는 그녀들에게 한여름 그늘 같은 휴식이었던 것이다. 흥과 한을 한 몸에 품은 그녀들의 삶에 단비 같은 것이었음을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솥단지에 쌀을 안칠 것이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과 요구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의 차이는 분명하다. 인간의 삶은 자주성을 기반으로 한다는데 가장 인간적으로, 자주적으로 살려는 삶의 기초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약장수 판에 끼여 손뼉 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서는 과정임을 의심치 않는다.

시간 내어 나도 꼭 한 번 따라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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