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보장, 전량 수매!” 영원한 농민 투쟁의 구호
“쌀값 보장, 전량 수매!” 영원한 농민 투쟁의 구호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6.06.1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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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우리의 오랜 역사를 한 마디로 줄이면 ‘쌀을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쌀이 주요 식량으로 자리 잡으면서 수천 년 동안 논을 만들어 온 농민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손바닥만 한 삿갓 논에서 청산도의 구들장 논, 바다를 막아 광활한 논을 확보한 간척지까지 민중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논을 만들어 쌀을 생산하기 위한 간고한 역사였다. 결정적인 승리를 앞두고 회군했던 갑오농민전쟁의 전주화약도 모심기 철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고 겨울을 앞두고 일어난 2차 봉기 역시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중에도 마음 한 편은 논에 가 있던 농민군이었다. 그렇게 벼 농사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절대적인 것이었다.

쌀을 자급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이다. 농민이 농사지어 온 국민을 먹여 살리게 되었으니 농민들은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과 감사를 받았을까.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인위적 저곡가 정책으로 쌀값은 생산비에 미치지 못했고 농가의 빚은 늘어만 갔다. 더구나 정부 수매를 줄임으로써 농민들은 더 싼 값에 상인에게 넘겨야 하는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눈먼 자본의 포로가 된 정부는 마침내 쌀을 두고 협상을 벌이며 이는 다름 아닌 농업포기 선언이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 농민운동단체들은 농민운동의 총력집중투쟁이 쌀값투쟁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1989년 11월 15일에 열린 ‘쌀값보장 및 전량수매 쟁취 농민대회’ 모습.

농어촌발전종합대책 분쇄 투쟁

정부는 1989년 4월 소위 ‘농어촌발전종합대책’이라는 것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복잡하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70년대 말부터 이어져온 개방농업 정책기조를 보다 구체화되고 체계화된 형태의 농업구조조정정책으로 바꾸면서 농업정책의 대전환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즉 1970년대 후반에 제기된 개방농정은 수입개방의 확대를 그 기조로 하면서도 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국내증산 위주의 정부지원정책이라는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결국 1980년대 중반의 소값 파동을 계기로 개방농정의 한 구성요소였던 복합영농정책이 파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농가부채가 급증하는 등 농가경제가 극도로 악화되고, 더구나 1980년대 중반 한국경제가 국제수지흑자로 인해 미국 등 외국으로부터의 거센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을 받게 되자, 정부는 대책이라는 미명 하에 완전히 반농민적 농업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용에는 농민들의 부채에 대한 이자경감과 복지 대책 등이 들어있지만 극히 미흡한 수준이고 주요 내용은 정부가 농지제도에 개입하여 농지거래에 대한 규제를 전폭적으로 완화한 것이었다. 이는 86년부터 진행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과 관련되는 문제였으나 협상의 진행과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정부 당국 또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과 불안은 높아졌으며 90년의 추곡수매가와 수매량을 이슈로 농민들이 대규모로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9월 7일에 열린 ‘UR협상 거부와 농어촌발전종합대책 분쇄 및 제값받기 제 1차 전국농민대회’는 농민들의 조직력을 대외적으로 보여준 투쟁이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한 이후 첫 번째 대규모 투쟁이었던 이날 대회에는 전국 8개 지역에서 2만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반대와 쌀값 쟁취를 위해 싸움을 벌였다. 경찰은 이 날의 대회를 막기 위해 경찰 병력을 1만2,000명이나 동원하여 원천봉쇄에 나섰지만 분노한 농심은 폭발하였다.

광주 전남에서는 3,000여 명의 농민들이 전남대 광장에 모였다. 사전에 연행되거나 격리된 농민이 3,600여 명이었고 군에서 봉쇄되어 오지 못한 농민들도 1,000여 명이었으니 8,000에 가까운 농민들이 집회에 참가한 셈이었다. 농민들은 투쟁선언문을 통해 망국적인 수입개방 저지, 쌀 전량 수매 및 수매가 12만 9,700원 쟁취, 노태우 민자당 정권 퇴진 등을 주장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 차량을 전남대에 진입시켜 진압을 시도했고 이에 맞서 화염병 1,000여 개와 돌멩이를 던지며 격렬히 저항, 전남대는 전쟁터로 변했다. 그 만큼 농민들의 분노는 큰 것이었다. 전주와 대전, 안동, 춘천 등지에서도 경찰과 맞선 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농민들과 연대하는 대학생들의 집회도 이어졌다. 쌀값 보장이라는 이슈는 국민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이끌어냈으며 수배중인 권종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격려사를 통해 ‘모든 세력과 연대하여 농민생존권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농민운동단체들은 이미 1989년 9월 8일 전국의 61개군 농민단체 대표들이 모여 ‘쌀값보장 및 전량수매 쟁취 전국농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농민운동의 총력집중투쟁이 쌀값투쟁이 될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이후 ‘쌀값보장! 전량수매 쟁취!’의 함성은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9월 12일 ‘풍년농사 자랑말고 쌀값보장 관철하자!’는 구호를 내세운 500여 명의 함평농민들이 경찰과 백골단의 원천봉쇄를 뚫고 최초의 가두투쟁과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함평농민의 투쟁은 공안정국 속에서 위축되어 있던 운동 분위기를 일신시키며 즉각 다른 지역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답답하면 나오시오! 억울하면 말하시오! 불안하면 뭉칩시다’라는 벽보가 수많은 마을에 나붙기 시작하면서 남원, 당진, 무안, 창녕, 심지어 지리산 첩첩산골에 이르기까지 ‘쌀값보장! 전량수매쟁취!’ 투쟁이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해 갔다.

그 외에도 각 도와 군단위의 역량과 조건에 맞는 투쟁도 전개하였는데 특히 ‘부채 현물납부 투쟁’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농협부채를 농민이 주장하는 수매가로 쌀, 고추, 땅콩, 참깨 등의 현물을 상환하고, 농가부채, 의료보험, 농지세, 수세, 기타 잡부금에 대한 납부거부 투쟁을 전개했으며, 각 지역별, 작목별 생산자단체와 결합하여 농축산물 수입저지투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다양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은 안전한 먹거리 운동의 하나로 ‘언니네텃밭’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2014년 11월에 열린 언니네텃밭 추수한마당 모습. 한승호 기자 9

여성농민운동의 전개

한국농민운동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여성농민들의 투쟁과 조직화다. 사실 모든 농민 투쟁의 현장에는 여성농민이 함께 하였다. 85년의 전국적인 소몰이 투쟁에서 여성농민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투쟁력을 보여주었고 이후의 농민집회에 때로는 여성 참여자의 수가 남성을 넘어서기도 했다.

1977년 가톨릭농촌여성회가 출범하였지만 농촌여성의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이후 80년대 투쟁을 거치면서 농사짓고 살림하며 아이 키우던 여성농민들이, 이중삼중의 억압을 온몸으로 말없이 감내해 왔던 그 여성농민들이 이제는 자신의 주장을 높이기 시작했다. 88년에 제출된 ‘자주적 여성농민운동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성농민운동의 역할과 과제를 설정하였다.

‘오늘날 여성농민의 활동을 저해하는 큰 요인은 여성농민의 주부로서의 역할에 대한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의식이다. 또한, 오랜 가부장적 억압과 지배에 의해 여성농민 자신들이 스스로의 자주적 의식을 억압당하거나 말살된 상태에서 자주적·적극적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도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억압되거나 말살된 여성농민의 자주의식을 회복하고 흩어져 있는 여성농민들의 힘을 하나하나 결집하여 빼앗긴 국민으로서, 농민으로서, 지역주민, 부모로서, 아내. 자식으로서의 자기주권을 획득하여야 한다. 이는 여성농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체의식으로 뭉쳐서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며 배우고 싸워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여성농민운동의 지도노선을 확립하고 여성농민 자주적으로 조직과 투쟁을 해나가는 자주적 여성농민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이후 1992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발족되기까지 여성농민들은 투쟁 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실로 눈물겨운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성농민을 의식화하고 조직으로 묶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단 한 사람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으며 보수도 지원도 없이 감시의 눈길을 피해 조직화에 나섰다. 여성농민운동의 과제는 여성농민의 독자적인 조직화였다. 여성 대다수가 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하기 어려운 가부장적인 남성조직으로는 여성농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일부 농민운동가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여성농민운동을 전체 농민운동의 분파로 인식하는 이들과의 이론투쟁도 초기 여성 농민운동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민이었다.

1988년에 제출된 ‘자주적 여성농민운동의 건설을 위하여’라는 문건은 여성농민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이후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문건은 여성농민운동의 올바른 이해와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역할, 농민운동 내에 존재하는 여성농민에 대한 경향성 등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가함으로서 많은 여성농민운동가들의 공감을 샀다. 이후 여성농민운동의 과제는 세 가지로 응축되어 실천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첫째, 여성농민 현실에 맞는 대중 선전, 선동 및 투쟁에 의한 대중 역량 확보와 이에 기초한 여성농민 대중조직의 건설, 둘째, 억압되거나 말살된 여성농민이 자주의식을 회복, 고양시키기 위한 선전과 교육, 농민운동 내의 가부장적 품성의 척결과 봉건의식의 타파. 셋째 올바른 여성농민 지도노선의 확립과 여성농민 지도력의 확보 등이다.

전여농은 조직된 이래 한국농민운동의 든든한 주체이자 안전한 먹을거리를 평등하게, 평화롭게 함께 나누며 농민으로서 식량주권과 농민해방이 온전히 실현되는 세상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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