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 제삿날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25

  • 입력 2008.03.09 20:05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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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인자 우리 휴전하자.”

새벽 세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술이 취한 ‘영일만 호랑이’ 작은아버지가 느닷없는 제안을 내놓으신다. 나는 작은아버지 맞은편에서 몸을 오른켠으로 비스듬히 틀어 앉아 남쪽으로 난 창을 바라보고 있다. 30년이 넘도록 당신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아직도 이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휴전이라니. 휴전이 아니라 종전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하신 말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아버지는 다시 중언부언 말을 이어 나가신다.

“나는 니가 날보고 제사 지내러 오지 마라고 하이 참 섭섭하더라. 나는 기독교도 불교도 천도교도 안 믿는다. 적은애비 종교가 조상이라는 거는 니도 알제?

또 그 소리. 이건 휴전선언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재작년이었지 싶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복숭아를 따러가야 하는 일 년 중에 가장 바쁜 시기에 있는 제사라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작은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작은아버지가 이번 제사에는 오시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술만 취하면 그때 일을 꺼내 놓으신다.

“이놈아, 적은애비가 니 한테 벨나게 했는 건 나도 인정한다. 글치만 그게 다 니 잘 되라고 한 소리다. 니하고 내하고 촌수가 시 촌인데 내가 잔소리 안하면 또 누가 하겠노. 그런데 나도 인자 마 죽을 날이 다 되었는동 지친다. 고마 휴전하자.”

새벽 한 시 반에 음복을 시작해서 세 시가 넘도록 음복주는 당신 혼자서만 드시고 한잔 권하지도 않는다. 밀창문 건너 작은놈 방에서 아직 기척이 들린다. 시끄러워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 증조부 제사는 좀 쓸쓸했었다. 제관이 없어 삼헌을 못하고 단잔으로 끝냈다. 큰놈입학식이 내일이라 아헌관인 아내가 거기에 가는 바람에 작은놈과 셋이서 지낸 것이다. 팔순 어머님은 아무리 권해도 산귀신이 절은 무슨 절이냐고 역정만 내셨다. 아마도 증조부님은 제주 한잔만 받으시고 쓸쓸하게 돌아가셨으리라.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작은아부지요, 종문이도 내일 고등학교 입학식이라 빨리 자야 되는데요. 세 시가 넘었심더. 고마 주무시소.”

“야야, 적은 애비가 조카하고 좀 친해보자는데 니는 와 자꼬 도망갈라 카노. 니 내하고 십 분만 더 이야기 하자.”

나는 엉거주춤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방바닥에 부려놓는다. 이런 일방통행은 고문이다. 나는 차마 얼굴은 찡그리지 못하고 마음만 왼새끼를 꼰다. 할 수만 있다면 톱 들고 가위 차고 복숭아밭으로 가버리고 싶다. 그러나 바깥은 음력 스무엿새라 칠흑이다.

“그란데, 내가 지난 가을부터 통 잠을 못 잔다. 니가 하도 그캐사가 그래라 했는데 제사도 안 지내는 내 증조부가 일년 내내 술도 한잔 못 얻어 잡수신다 생각하이…… 야야, 니 담배 사 놓은 거 있거던 하나 도고.”

내용인 즉슨 이렇다. 몇 해 동안이나 동생과 나는 생가 마을 선산의 아버지부터 고조부 까지는 묘사를 따로 지내지 말고 벌초하는 날 술 한잔 올리는 것으로 하자고 부탁을 했는데 작년에야 작은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나는 3대 봉제사를 지내므로 고조부는 제사가 없기 때문에 묘사만은 갖은 제수를 차려 예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반대 입장을 말했다간 날이 밝아도 이 어른은 술잔을 놓지 않을 것이 뻔하다. 나는 자꾸 시계만 쳐다본다.

“니 욕보는 거 내 다 안다. 고마 가가 자거라.”

나는 석방된 포로처럼 내 방으로 돌아온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지게목발 두드리는 나를 4월 28일 날 중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던 작은아버지. 중학교 졸업하고 지게목발 두드리라는 아버지의 말에 진학을 포기하고 체력장 시험을 보지 못한 조카를 고등학교에 보낸 어른. 딸만 다섯인 당신 둘째 형님에게로 양자로 보냈지만 두 번이나 그것을 파기해버린 나를 코 꿰어 끝끝내 당신의 뜻대로 하신 분.

까무룩 잠이 들었던가. 작은아버지가 노새처럼 나를 업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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