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농업·농촌이 쓰러진다 … ‘농민’ 백남기가 남긴 과제

  • 입력 2016.05.29 08:44
  • 수정 2016.05.29 08:5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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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사진 박경철 기자]

지극히 평범했던 한 노인의 이름이 온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 200일, 그의 이름 앞뒤엔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농민’이다.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경찰의 불법적 폭력진압이 농민을 쓰러뜨렸다는 ‘현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남 보성 들녘에서 농사짓던 그 농민이 종로거리 경찰의 살수차 앞에 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 또한 백남기 농민 사건을 목도한 이들이 풀어내야 할 과제다.
어디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농업·농촌의 현실 속에서, 그 과제를 짊어지길 자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지는 사건 이후 줄곧 백남기 농민의 곁을 지켜 오고 있는 ‘농민의 길’ 소속 4개 단체 정책기획 담당자들을 모아 백남기 농민 사건의 본질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했다.

좌담
김영규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정책기획실장
이춘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손영준 가톨릭농민회 사무총장

사회
심증식 한국농정신문 편집국장

▲ 지난달 24일 본지가 개최한 ‘백남기 200일’ 좌담회에 참석한 농민의 길 소속 농민단체 임원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농업·농촌 극에 달한 위기감, 민중총궐기로 표출

심증식(사회): 백남기 농민 사건 200일을 맞아 ‘백남기 200일이 남긴 과제’를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다. 우선 사건의 본질을 분명히 하고 싶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는 왜 열렸으며 왜 그렇게 많은 농민들이 참석한 건가?

박형대: 50개국에 달하는 FTA, 쌀 전면개방, 수입농산물 범람, 이런 일들이 이어지면서 농촌과 농민들에게 패배의식이 드리우는 시기였다. ‘농업은 전망이 없다’, ‘이대로 무너지는 것 아니냐’라는 생각이 만연했고 농사는 투기에 가까운 형태가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단결된 힘으로 농정을 한 번 바꿔보자는 의미로 대규모 집회를 하게 됐다. 꺼져 가고 있는 불씨를 되살린다는 의미였다.

손영준: 당시 엄청나게 많은 농민들이 모였고 가톨릭농민회에서도 아마 역대 최다 참여를 기록하지 않았나 싶다. 농민들의 참여도가 높았던 것은 당시 밥쌀용 쌀 수입으로 대표되듯 농업에 위기감이 고조됐기 때문이었다. 백남기 농민도 평소 농민대회에 참여하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이날은 절친한 지인의 자녀 결혼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회에 참석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지금 안 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 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이춘선: 여성농민들은 8월에 여성농민대회를 치르고 나면 보통 11월 농민대회엔 참여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지난해 밥쌀용 쌀이 수입되고 쌀값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쌀마저 무너지면 농업은 끝장이다’라는 위기감을 느낀 것 같다. 서울에 왜 올라가는지를 전보다 더 고민하고 올라가는 계기가 됐다.


암담한 농촌현실 …농사로 먹고 살 수가 없다

▲ 이춘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
심증식:
민중대회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농민들이 대거 참여한 건 여러 참여주체 중에서도 농민들의 위기의식이 특히 높았기 때문인 것 같다. 최근 우리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진단해 본다면.

이춘선: 20년 전 농촌에 들어왔을 땐 벼농사 한 가지만 조금씩 지어도 생계가 가능했는데 지금은 거의 특작 위주로 바뀌었다. 농한기·농번기 개념이 거의 사라질 만큼 작목도 시기별로 다양해졌다. 자기 먹고 살기가 바빠지다 보니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지고 농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공동체문화가 사라졌다. 개인적으론 이 문화의 소멸이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손영준: 농민이 농사만 지어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는게 중요한 문제다. 통계를 보면 농가소득 중 농업소득이 3분의1이고 농외소득이 3분의2다. 생산해서 가공·유통 하고 6차산업이다 뭐다 온갖 것을 다 해보고 있지만 그래도 살기 어렵단다. 앞으로 농업문제를 다루면서 들여다봐야 할 중요한 현실이다.

김영규: 한때 친환경농업이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안전한 농산물 생산 측면도 있겠지만 기존보다 나은 소득에 대한 농민들의 기대도 컸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2009년 19만8,000농가로 정점을 찍었던 친환경농업은 불과 5~6년 사이에 4분의1토막이 났다. 정부 육성정책의 부실이었으며 결국 친환경농업도 아직 소득안정의 대안은 되지 못하고 있다.

박형대: 주변을 보면 평생 농사를 지어 온 사람의 삶이란 게 내가 봐도 너무 비참하다. 우리 마을만 보더라도 한두 명 대농만이 동네 생산의 절반을 해내며 부를 축적하고 있다. 나머지는 농기계가 커지고 집도 좋아졌지만 계속해서 빚을 안고 살아간다. 딱히 나아지는 것 없이, 쳇바퀴 돌듯이, 자녀들이 돌아올 일도 없고 그 세대에서 끝을 볼 일이다.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다.

김영규: 논산의 어떤 면은 이주노동자가 6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젠 이주노동자 없이는 농사짓기가 힘들다. 국산 농산물이지만 외국인들 손에서 자라는 꼴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여성인력 일당이 3만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모셔오고 모셔다드리고 식사에 새참까지 제공하면서 10만원을 줘야 하는 상황이 왔다. 그렇다면 농산물 값이 올라와 줘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농업정책, 농업의 가치를 전제하라

심증식: 백남기 농민 사건이 일어난 이 시점의 우리 농업은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지난 20년간의 농정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농정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할지가 관건이겠다.

손영준: 얼마 전 농식품부 사람을 만나 지금 농정방향이 뭐냐고 물으니 ‘일자리 창출’과 ‘농산물 수출’이라더라. 대통령이 국무회의 때마다 장관에게 물어보는 게 그 두 가지고 실제로 농정이 그 두 가지 방향으로 짜여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식량자급률 제고나 소득보전을 외치고 있는데 그렇게 얘기하니 농식품부와 별로 할 얘기가 없었다. 농정은 농민들이 농촌에서 지속적으로 농사짓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거기에 자급률이나 소득보전, 농촌복지 정책 등이 따라가는 것이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농정방향이 없는 것 같다. 미국을 보면 농업법이라 해서 5년 단위로 농정방향이나 정책을 정하도록 제도적으로 돼 있다. 우리는 그런 게 없으니 정권에 따라 정책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장기적으로 농정을 펼칠 수 있게끔 만드는 법 제도도 필요하다.

▲ 김영규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정책기획실장
김영규:
우리 농정의 근본적인 문제는 농업·농촌·농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자체가 완전히 잘못돼 있다는 것이다. ‘없으면 수입해 오면 되지’ 하는 수준의 정책을 20년 동안 일관하고 있는데, 농업이 갖는 공공재로서의 가치에 대해 지금보다 100배는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농산물로 제 값을 받을 수 없다면 농민들의 기본적인 소득을 안정시켜 농촌 지역사회와 농업을 유지하는 데 대한 보상체계를 만드는 것이 맞다. 꿈 같은 얘기가 아니라 유럽 같은 사회에선 이미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농업정책이 아니라 국가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아 아쉽다.

이춘선: 농업과 농민의 가치에 대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합의를 이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농업의 다원적 가치는 자본주의에 맞닥뜨려 무너져 내린지 오래다. 우리 집은 비교적 농업기반을 잘 닦아놨다고 생각하지만 아들에게 농사를 지을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면 전혀 들어올 생각이 없단다. 농업의 가치를 젊은 세대나 우리 국민들에게 일깨워주는 방향의 정책도 병행해야 하는데 그런 정책은 간 데 없는 현실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이런 개념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농업정책을 수입개방 일변도로 추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박형대: 식량자급률이 무너지는 것과 생산의 자립력이 무너지는 것은 연동이 된다. 종자에서부터 농약·기술, 이제는 노동력까지 모두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 식량자급률이 무너지니 결국 농촌사회의 정상적인 자립구조가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식량주권을 지킨다는 건 단순히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민생을 지키는 중요한 축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돈을 가지고 모든 것을 사서 하겠다는 생각은 결국 사람은 없이 돈만 굴리는 결과를 낳는다.


농민을 지키는 건 농민 자신이다

심증식: 그러면 우리 농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쌀 수입하지 말자고 광화문에 나서면 물대포를 맞는 엄중한 분위기에 처해 있다. 농민들이 농정의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박형대: 농민을 지키는 것은 결국 농민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는 방법으로 노조 가입을 권했듯이 우리 농민들도 노조처럼 단결해야 권리를 찾을 수 있다. 농민들은 워낙 관변조직에 익숙해서 사실 농민들끼리 단결하기보다 시·군청에 줄서는 것이 더 빠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농민을 지킬 수 있는 건 자주적인 농민조직이다. 자주적인 농민조직들이 법적으로 지위를 보장받고, 이 조직이 정부와의 교섭권을 획득하고, 이런 여건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 손영준 가톨릭농민회 사무총장
손영준:
농민들이 가장 많은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한 정당이 농업·농촌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런 모순을 바꿔내야 한다. 그래서 2017년 대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농정방향이 계속 이어진다면 위기를 넘어 절망이 올 것이다. 그나마 지금의 농정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대선이라 보고 그에 대한 준비를 농민단체들이 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농민단체들이 농민들에게 자신있게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김영규: 우리 단체의 이름이 ‘국민과 함께하는 농민의 길’이다. 정책 자체는 정권이 바뀔 때마나 계속해서 바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전 국민의 사회적인 합의가 있다면 정권이 바뀌어도 방향을 유지시킬 수 있다. 단기적인 과제도 필요하지만 국민들의 농업에 대한 이해가 희박해져가고 있다는 게 분명한 사실이다. 농민뿐 아니라 국민들이 농업·농촌 문제를 함께할 수 있도록 꾸준히 선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춘선: 노동자들은 협상을 하면 노사협상을 한다. 농민들만큼 정치권이나 정부와 맞닿아있는 집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이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정치적인 힘을 가져야 하며, 그런 면에서 농민의 정치세력화가 정말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농민들이 내 놓은 정책은 많다. 반영만 됐더라면 상당부분 농업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겠지만 정치권은 요지부동이다. 아직은 농민 정치세력화가 광범위하게 돼 있진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정이 변화되고 거꾸로 가는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농민들이 스스로 정치세력화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백남기 사건은 한국농업의 자화상

▲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심증식:
마지막으로 오늘 좌담회의 가장 핵심적 주제이기도 한 ‘백남기 농민 사건이 남긴 우리 농업의 과제’에 대해 한 말씀씩 정리발언을 부탁드린다.

박형대: 힘 없는 농민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도 아무 대책이 없는 국가권력의 모습은 사회적으로 경악할 만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농업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아무 대책 없는 정권의 모습과도 똑같다. 우리에게 큰 숙제로 남아 있는 부분이다. 다만 우리 농민들 나름대로는 백남기 농민의 모습을 통해 희망과 자신감을 얻은 부분도 있다. 그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우리 농업의 모습 그대로였다. 집에 소가 100마리 있고 논밭이 수만평 있거나 했다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다. 욕심 없이 소소하게 밀 농사를 짓고, 겨울엔 된장 담가 팔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함께해준 것이다. 우리 농민운동이 가야 할 길을 백남기 농민의 삶 속에서 배운다. 비록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묵묵히 한 발 한 발 걸어나가는 게 국민들의 관심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김영규: 백남기 농민 사건은 작금의 한국농업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 모양새다. 먹통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국가의 태도는 또한 우리 농업에 대한 태도와도 똑같다. 진실을 밝혀내고 사법적 처리까지, 모든 과정들을 끝까지 해내야겠다는 결의를 다져본다. 그런 의지를 가지고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춘선: 백남기 농민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까지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분이 그 동안 살아오셨던 모습, 그리고 왜 농민대회에 갈 수밖에 없었나 그 절박한 심정을 생각하면서 향후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백남기 농민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에 따라 우리 농민들의 미래를 달리 그릴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손영준: 백남기 농민 사건이 발생한 11월 14일 대회에서 농민들이 밥쌀용 쌀 수입 반대를 외치고 나서 12월에 바로 추가수입을 하지 않았나. 농민이 이 지경에 있는데도 안하무인 격이다. 박근혜 정부 하의 농민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너무 극명하게 보여준 일이다. 우리가 백남기 농민을 살려내라고 얘기하는 것은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바라는 것뿐 아니라 계속 주장하듯 농업·농촌·농민을 살려내라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다. 그런 인식과 공감대가 그래도 지금까지 많이 이뤄졌다고 본다. 계속해서 백남기 사건에 대한 대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 속에서 농업·농촌문제 해결을 지속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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