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오늘의 단상

  • 입력 2016.05.29 08:30
  • 기자명 황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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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정미(경북 의성군 봉양면)
5시가 덜 되었는데 눈이 뜨인다. 거실에서 남편이 자고 있다. 좀 있으니 핸드폰의 알람이 심하게 운다. 남편은 일어나더니 주섬 주섬 나갈 채비를 한다. 지켜보는 나는 열이 차 오른다. 우리집의 본업 농사인 마늘, 자두, 한우 외에 남편은 지금 벌농사를 벌여 놓았다. 자두 적과를 거의 열흘 넘게 그 뜨거운 날에 지속적으로 했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이쯤되니 나도 지치고 끝나지 않은 일을 두고 또 새로운 일을 하러 가는 남편이 곱지가 않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결국 자두나무 잘라내자 라는 끝판 말이 나오고 남편은 나가 버린다.

언제 적부터 예약해 놓았던 동네에서 제일 손 빠른 영산댁 놉이 오는 날이라 더욱 맘은 바쁘다. 대충 하루 먹을 밥과 국과 반찬을 한다. 소밥도 오늘은 내 차지다. 그리곤 어제 온 비로 빗물을 가득 머금은 자두밭으로 가니 어설프다. 안개도 자욱하고 잎에서 떨어지는 물에 온몸이 금방 젖어 버린다. 온다던 영산댁 아지매도 감감하다. 자두밭에 일찍 약치고 온 댔는데. 문자를 하니 남편이 몸이 안 좋아 일찍 나서지를 못했단다.

맘이 더욱 복잡해진다. 핸드폰을 꺼내 노래를 튼다. 제목도 모르고 부르는 가수도 모르지만 아들이 자기 좋아하는 노래들을 다운 받으면서 내폰에도 해 주었다. 혼자 일할 때 들으라고. 유일하게 아는 가수와 노래는 자이안트의 양화대교이다.

노래가 흘러나오니 맘이 좀 차분해 진다. 꿀 따러 간 남편과 오지 않는 영산댁 아지매를 원망하는 맘을 이해하는 맘으로 정리를 하려고 내 마음을 다독인다. 남편 말도 맞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새벽같이 꿀 따러 가는데. 그러나 그 빈자리가 다 내 차지가 되니 난 힘겹다. 영산댁도 아픈 남편과 같이 농사를 짓는데 그래도 거절을 못해 일 해준다고 답은 해 놓고 못 오니 본인은 더 속이 탈 것이다.

노래가 한판 돌아가니 양화대교도 한번 더 듣고, 이제 안개도 좀 걷힌다. 그래 오후에나 되어야 일이 본격적으로 되겠구먼. 영산댁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은 우리집에 와서 드시라고 한다. 점심을 먹고 둘이서 자두 적과를 한다. 영산댁께서 주인맘이 좋아 날도 시원하니 잘 잡았다며 좋아하신다. 오전의 속 답답하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일을 하니 잘도 진행된다. 꿀을 따러 갔던 남편도 합세한다. 날이 갑자기 너무 더워 꿀도 얼마 없고 벌들까지 도망을 가 버렸단다.

영산댁 아지매는 나가는 남편 뭐라 하지 마란다. 나갈 때가 좋단다. 이런 말씀이 있나! 나갈 때가 좋다니. 아픈 남편 일년 내내 집안에 있어 보란다. 그 말씀도 맞지. 덩달아 그 말을 들은 남편도 신이 난다. 전지도 훤하니 잘해 놓았다 그러시고, 자두도 굵다며 칭찬을 늘어놓으신다. 역시 먹기도 같이 먹어야 하고 일도 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자두 적과에 열흘 이상 묶이다 보니 마늘논에는 풀이 자라 꽃을 피웠다. 없는 놉이지만 일찍 놉을 해서 일을 그때그때 처리해 나가야 한다. 올해는 둘이서 해 보자고 맘도 야무지게 먹고 시작했었다. 둘이서 핸드폰의 팟캐스트 방송 틀어 놓고 하니 좋긴 하다. 그러나 나갈 일은 사정없이 생기고, 일은 자꾸만 쳐진다. 그러는 사이에 마늘논은 풀구덩이고, 우사엔 소똥이 찬다. 그때부터 속이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그러다 이렇게 반나절이라도 놉을 해서 일이 끝마쳐지면 언제 그랬나 싶게 평온해 진다. 이것도 무슨 일병인지.

나도 50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모든 농사일을 좀 평온하게 받아 들이고 싶다. 어릴 때 바쁜 일철만 되면 아버지는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시며 짜증을 잘 내셨다. 난 그것이 무척이나 싫었는데 나도 똑같이 닮아 있다. 조롱조롱 달린 자두만 볼 것이 아니라, 높은 하늘과 둘러쳐진 푸른 산들을 보면서 좀 더 수양을 쌓아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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