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여의도 대투쟁의 전개

  • 입력 2016.05.22 22:03
  • 수정 2016.05.22 22:1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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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26일, 대전에서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가 열렸다. 전 해에 연인원 3만 여 명에 이르는 농민 시위가 전남북을 중심으로 이어졌으나 농민들이 주장하는 ‘수세 폐지, 수리청 신설’에 대하여 수세를 단보 당 10kg으로 인하하겠다는 정치권의 약속이 있었을 뿐이었다. 대책위원회에서는 농민들의 기세를 모아 결정적인 투쟁을 전개한다는 데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방안에 대해서는 동시다발적인 도 단위 투쟁 전술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국단위 투쟁 전술의 두 가지 안이 제기되어 치열한 회의를 거쳤다. 그리고 결론은 여의도에서의 전국 집회였다.

▲ 수세 폐지 및 고추 전량수매 쟁취를 위해 1989년 2월 13일에 열린 여의도 대투쟁은 농민들에게 단일 대오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확인시켰다. 사진은 1990년 4월 24일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대회 모습.

한편 전남북이 중심이 된 수세 투쟁과 함께 경남북과 충북 지역 등에서는 고추 값 폭락에 따른 고추 생산비 보장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추뿐만 아니라 쌀, 담배, 땅콩 등 농산물 전반에 걸쳐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이 확산되고 있었다. 88년도에 전국 40개 시군에서 100여 차례 이상의 시위가 벌어졌으나 지역 단위의 고립 분산 투쟁은 폭력적인 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맞서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없었다.

여의도 대투쟁의 결의는 이러한 농민운동의 결집된 힘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며 승리를 일구기 위한 것이었고 농민운동사에 결정적인 한 장으로 남았다.

수세 폐지와 고추 전량수매를 위해

1989년 2월 13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속속 여의도로 모이기 시작했다.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와 전국고추생산지역 대책위원회의 2개 농민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대회였다. 이른 아침부터 지역에서 집결한 농민들이 서울을 향해 출발하고 여의도에는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농민운동을 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을 뽑으라면 89년의 여의도 대회였습니다. 농민들의 열기도 대단했고 무언가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지요. 그 때의 경험이 지속적으로 농민운동을 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거 같아요.”

당시 여의도 대회에 참가했던 많은 농민들은 비슷한 감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만큼 2.13 여의도 대회는 중요한 전기였다.

최종적으로 여의도에 모인 농민들의 숫자는 2만5,000여 명이었다. 오후 1시 30분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진행된 농민대회에서 농민들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부당한 수세는 더 이상 존속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간접시설인 수리시설의 설치와 관리는 당연히 수리청 형태의 국가기관이 맡아야 하고, 농민들의 피땀인 고추는 생산비가 보장되는 가격으로 전량 정부에서 수매하여야 한다. 우리는 요구한다. 부당 수세 폐지 및 적립금 반환하라, 농지개량조합 해체와 수리청 신설하라, 남북농산물 직거래 즉각 수락하라, 농산물 수입 개방 중단하라.’

집회를 마친 농민들은 오후 세시부터 노태우 정권을 상징하는 꽃상여를 앞세우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국회의장과 4당 총재와의 면담을 요구한다는 명분이었다. 상여를 앞세운 평화적인 행진이었으나 경찰은 농민들에게 최루탄을 쏘아댔다. 25개 중대 3,000여 명의 경찰이 여의도에 배치되어 있었다. 분노한 농민들에게 기름을 끼얹은 것이었다. 농민들은 보도블록을 깨 격렬한 투석전으로 맞섰다. 순식간에 여의도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최루탄이 자욱하게 터지고 돌들이 날고 비명이 터졌다. 이미 여러 차례 지역에서 혹은 서울에서 경찰과 맞서본 경험이 있던 농민들은 이 날 순순히 퇴각하지 않았다. 분노와 흥분에 휩싸인 농민들이 마치 끝장을 볼 것처럼 격렬하게 경찰과 맞붙었다.

편파보도를 일삼던 KBS 차량을 본 농민들이 차량에 불을 질러버렸다. 일설에는 잔디밭에 붙은 불이 차량에 옮겨갔다고도 하고 편파방송에 항의하여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농민들의 분노가 옮겨 붙은 것만은 분명했다. 25인승 KBS 미니버스가 화염에 휩싸이고 이어서 새마을봉사대 소속 차량에도 불이 붙었다. 이 날 불에 탄 차량만 7대였다. 학생 시위가 격렬했다고는 하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가히 갑오농민혁명군이 다시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투쟁은 가열차게 타올랐다.

여의도 광장에서 국회의사당으로 통하는 마른 잔디가 덮인 화단 200여 미터도 불에 타고 일곱 그루의 전나무도 불길에 타올랐다. 그것뿐 아니었다. 여의도 광장 옆에는 새마을봉사대 여의도 지부의 간이 건물과 새마을분식 매점이 있었는데 농민들에게 그 새마을 구호는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결국 그 건물들 역시 불에 타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전경 기동대의 숙소로 이용되던 건물도 불에 타고 인근 건물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이 날의 시위는 말 그대로 시가전이었다.

물론 시위 과정에서 부상자도 속출했다. 농민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전경도 수십 명이 다쳤다. 흥분한 농민들은 기자의 카메라를 뺏고 보수신문 기자를 구타하기도 했다. 약 세 시간에 걸친 격렬한 싸움으로 농민 38명이 연행되었고 농민들은 투쟁을 정리한 후 300여 대의 전세버스에 나누어 타고 지역으로 내려갔다.

2.13 농민 대투쟁에 노태우 정권은 경악했다. 지방 순시 중이던 노태우는 급거 귀경하여 전국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대대적인 검거령으로 총 458명이 연행되었고 이중 117명이 입건되었으며 15명이 기소되었다. 여의도 대투쟁은 농민운동의 분노와 역량을 보여준 획기적인 투쟁이었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일정하게 운동이 위축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노태우 정권은 한 편으로 수세를 단보 당 5kg으로 인하하고 한편으로는 농민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하면서 농민운동의 진출에 대해 정권적 차원의 고민을 떠안게 된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결성

여의도 대투쟁은 농민들에게 단일 대오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확인시켰다. 투쟁에서 확인된 농민대중의 자주적 진출은 더 이상 기존에 활동하던 기독교, 가톨릭 등의 종교적 외피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농민대회 직후인 3월 1일 각 시군의 농민대표 1인, 참관인 2명씩 9개 도 95개 시군 농민대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체 농민운동의 통일적인 구심체로서의 전국농민운동연합이 결성되었다. 전농연은 농민대중의 당면투쟁과 자주적 조직화를 지원, 강화하기 위한 농민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각 시군마다 농민회를 건설하여 실질적인 농민대중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에서 분출하기 시작한 농민들의 요구는 2.13 농민대회를 통해 농민들을 사회변혁의 핵심주체로 나서게 했으며 많은 선진 학생활동가들이 농민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노태우 정권은 농민들의 절박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농산물의 수입자유화 계획을 발표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개방농정을 추진하면서 농업축소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농민들은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농민운동 진영은 소수의 고립된 농민조직으로는 정부의 농업포기 정책을 극복할 수 없다는 상황 인식에서 자주적 농민회 결성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지역 농민회를 하나로 묶어 전국적인 농민조직의 결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전농연 외에도 전국농민협회와 독자농전국모임 등 분리되어 있던 농민조직을 전국단일조직으로 결성하기 위한 연석회의가 열렸고 주요 간부들이 모여 강령과 조직체계를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대한 4개 항이 합의되었다. 첫째, 합법 공개 대중조직일 것, 둘째, 변혁지향적인 조직일 것, 셋째, 빈농, 소농 주동의 원칙을 견지할 것, 넷째, 시군 농민회를 구성주체로 할 것 등이었다. 그리하여 78개 농민단체대표자로 전농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전농 준비위 총회를 거쳐 1990년 4월 24일, 역사적인 전국농민단일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게 된다. 건국대학교에서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초대 의장에 권종대를 선출하고 사무처장은 강기종이 맡았다. 모두 80년대 농민운동의 맹장이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결성은 치열했던 80년대 농민운동의 성과물이었다. 수많은 투쟁 속에서 농민들이 각성하고 당당하게 변혁의 주체로 나섬으로서 해방 공간에서 허물어진 전국적인 농민조직이 40여 년 만에 복원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전농의 조직과정에서 몇 가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도 있었다. 기존의 농민조직들이 완전히 화학적인 결합을 이르지 못했고 전국여성농민회는 결성 과정에서 이견을 해결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조직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충분한 정치사상적 토론과 조직 노선에 대한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논의가 부족했다는 성찰도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농의 결성은 농민운동의 단일성과 지도성을 확보하고 전체 민족민주운동에 농민운동이 힘 있게 결합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전체 변혁운동에서 농민운동이 확고한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는 결정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농민운동은 90년대를 맞아 전농의 깃발 아래 새로운 투쟁을 해나가게 된다. 국내외에서 가파르게 변해가는 정세와 탄압에 맞서 승리와 좌절이 교차하는 90년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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