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우물①] 앵두나무 우물가에

  • 입력 2016.05.22 12:27
  • 수정 2016.05.23 09:5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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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내 엄니는 내가 거처하는 지리산 산간마을 인근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내신다. 치매가 심하여 아들인 나를 알아보지 못 한 지가 수년째다. 요양원의 사회복지사에 따르면, 치매를 앓는 분들 중에는 매우 거칠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이는 분들도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 엄니는 매우 얌전하여서 ‘부처님’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하루 종일 거의 말이 없는 편이지만, 다만 가끔 소싯적에 부르던 노래를 가만가만 흥얼거린다. 그 중 애창곡은 단연 ‘앵두나무 처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 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 노래는 1956년에 발표됐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에 이른바 ‘무작정 상경’의 열풍이 몰아치던 60년대 중반이후에 더 널리 유행하였다. 나 같은 꼬마도 흥얼거리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동네 처녀들의 가슴에 ‘서울바람’을 불어넣은 문제의 장소가 우물가일까? 그리고 아흔이 훌쩍 넘어서 대부분의 기억을 놓아버린 내 엄니는, 왜 또 하필이면 소싯적에 불러댔을 그 많은 창가(唱歌)들을 다 놔두고, 기억의 창고 저 밑바닥에 있는 ‘우물’ 이야기를 꺼내서 흥얼거리는 것일까?

옛 시절 농촌마을의 공동우물이야말로 여인들의 공간이었다. 대체로 공동우물은, 물을 긷는 샘이 있고 그 아래쪽에 빨래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아직도 해마다 ‘새암제’를 지낸다는 충청도 홍성의 등대실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상탕’과 ‘하탕’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물을 긷고 빨래를 하는 일들이 온전히 여인네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짐 지워졌으니, 그 시절 촌락의 공동우물이야말로 여인들 전용의 소통공간이었다.

물론 우리 같은 꼬마들이야 물 길러 가는 엄니를 따라가기도 하고, 혹은 마을 공터에서 뛰어놀다 귀가하는 길에 목이 마르면 거침없이 우물가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들이켜기도 했지만, 남자 어른들이 드나드는 것은 금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 금남의 공간이, 어깨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정네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로 넘쳐날 때가 있었다. 일 년에 두어 번쯤은 마을 청년들이 출동해서 더럽혀진 물을 퍼내고, 우물바닥도 청소를 한 다음에 새로이 물을 받기 위한 작업을 하였다. 내 고향 마을에서는 그걸 두고 ‘샘을 댈인다’고 하였다. 아마도 한약재나 간장을 오래 끓이면 양이 줄어드는 것처럼, 샘물을 퍼내어서 마르게 한다는, 즉 ‘달인다’는 의미였던 듯하다.

청년들 10여 명이 샘을 빙 둘러싸고서 “으이쌰, 으이쌰!” 따위의 요란한 소리를 질러가며 한꺼번에 두레박질을 하는 모습은, 구경하는 우리가 보기에도 참말 장관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퍼내자 드디어 샘물의 수면이 퍼런 이끼 눈금의 아래쪽으로 쑤욱 내려갔다. 이때쯤이면 청년 두어 명이 안으로 들어가서 아예 양철물통으로 물을 퍼서는 위로 전달한다. 드디어 자갈바닥이 드러났다. 샘물 퍼내는 모습을 다른 꼬마들과 함께 지켜본 것은 조금은 야릇하고 또 조금은 허망한 경험이었다. 동네 청년들은 샘에서 물만 퍼낸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엄니를 따라가서 까치발을 하고 우물물을 내려다보았을 때, 우물 속에서 나를 빤히 치어다보던 빡빡 머리 사내아이의 얼굴도, 아득히 깊은 곳에서 어딘가로 천천히 흘러가던 구름덩이들도…모두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대신에 우물바닥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들이 인양되었다. 누군가 잘 못 하여 빠뜨렸을 또가리(또아리. 똬리)며, 머리핀이며, 유리병 조각이며….

바닥 청소를 하던 병수네 삼촌이 “어떤 놈이 이런 것을…”, 하면서 남자 아이의 검정고무신 한 짝을 집어서 우물 밖으로 내던졌다. 나는 그것이, 샘 옆 공터에서 돼지 오줌보를 차고 놀 때, 그만 헛발질을 하여 날아가 빠져버린 종석이의 신짝이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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