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정미소④] 옛날 정미소는 다 어디 갔을까

  • 입력 2016.05.14 20:36
  • 수정 2016.05.14 20:37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상락 소설가
이제 지흥옥은 떠돌이 방아나 찧는 발동기 주인이 아니라 어엿한 정미소의 ‘소장’이 되었다. 물론 볏짚으로 지붕을 씌워서 얼기설기 세운 시설이었지만, 그래도 발동기 바퀴를 짊어지고 이 마당 저 마당으로 떠돌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만만 해도 출세를 한 셈이었다.

그런데, 정미소 건물마다 모자를 쓴 굴뚝처럼 우뚝 솟아있던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벼를 탈곡하여 현미를 만드는 과정까지는, 곡식을 담고 붓고 하는 작업을 사람이 직접 한다. 그러나 현미를 백미로 만드는 공정에서는, 도정된 쌀이 승강기를 타고 저절로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면서 방아를 찧게 된다. 곡식을 위로 끌어올리는 그 승강 장치 때문에 정미소 지붕 한 쪽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붙박이 정미소를 갖게 되었다고 해서 작업환경이 좋아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곡식 탱크에 벼를 퍼 담아서 일차 도정한 뒤, 그 현미를 다시 정미기의 통에 퍼 넣는 작업은, 정미소 주인과 방아 찧으러 온 곡식 주인이 함께 하였는데, 환풍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 하였기 때문에, 정미소 주인은 방아를 찧는 내내 먼지 구덩이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정미소를 운영하던 사람들 중 폐질환을 앓는 이들이 많았다. 발동기를 운반해 가면서 방아를 찧으러 다니던 시절에는 구경삼아 모여들던 아이들도, 먼지 구덩이의 정미소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그 시절 정미소에 들어가 봤던 사람이라면 정미소 주인이 곡식 탱크의 모가지 쪽에 사각형의 함석조각을 찔러 넣기도 하고 빼내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건 마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곡식탱크의 목 부분 내부가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곡식을 다른 경로로 바꿔 보낼 때 트기도 하고 차단하기도 하는 장치이다.

방아를 찧고 나면 쌀겨와 싸래기(싸라기)가 부산물로 발생한다. 땔감이 궁하던 시절, 산이 없는 평야지대 사람들은, 그 쌀겨를 가마니로 담아다 부엌 한 쪽에 쌓아두고 연료로 사용하였다. 강진에서 중학을 다닐 때 나도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쌀겨를 조금씩 뿌려가면서 풍로를 돌려 불 때는 일을 거든 적이 있다. 물론 시골마을까지 연탄이나 석유가 보급되면서 쌀겨를 챙겨갈 필요가 없어졌지만.

도정과정에서 나온 싸래기 역시,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았던 시절에는 소중하게 챙겨가지고 가서 보리에 섞어 반지기 밥을 짓거나, 혹은 개떡으로 만들어서 허기를 채우기도 했으나, 시절이 좋아지면서 싸래기를 가져가는 사람도 없어졌다. 그 싸래기는 엿 공장이나 사료 공장에 납품되어서 정미소 주인의 부수입원이 되었다.

지흥옥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파주로 진출하여 규모가 훨씬 큰 정미소의 주인이 되었다. 고모부가 하던 정미소를 인수한 것이다. 시설 규모가 커지면서 발동기의 동력도 점점 높여야 했다, 16마력으로, 20마력으로, 다시 30마력짜리로… 점점 힘이 더 센 발동기가 정미기를 돌렸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무렵이 되자 정미소 한 쪽 울타리 안에서 요란하게 울려대던 그 발동기 소리도 결국 추억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정미소마다 전기 모터가 도입되어서 스위치만 올리면 기계가 돌아갔다. 나머지 공정 역시 자동화되어서, 일일이 곡식을 퍼 담는 수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기름투성이의 작업복도 벗어던졌다.

“이 지흥옥이도 한 때는 파주 법원리 일대에서 유지 소리를 들었다니까요, 허허허.”

그 시절, 읍면 단위의 지역사회에서 주민체육대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양조장 주인과 더불어 정미소 주인도 당당히 유지대접을 받아서, 본부석에 떠억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는 옛 시절의 그 재래식 정미소는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방아 찧는 일이 ‘산업’이 되었다. RPC라는 이름의 대규모 도정공장이 등장하여서 공장마다 자체브랜드의 쌀을 생산하여 출하한다. 벼를 베고, 탈곡하고, 건조하고, 도정하고, 시장에 공급하는 일체의 과정이 농민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 이뤄진다. 그래서 ‘농민이 더 살기 좋아졌느냐?’ 하는 것은 별도로 따져볼 문제지만.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