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졌다, 수세 투쟁의 봇물

  • 입력 2016.05.08 23:18
  • 수정 2016.05.08 23:3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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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같은 기관이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농민들에게 팔아먹는 농지개량조합, 조합원인 농민들에게 강제로 그들이 거두는 것은 수세였다. 수세란 쉽게 말하면 ‘물값’인데 댐과 저수지, 수로 등 수리시설 건설비와 관리유지비 그리고 조합 직원의 인건비까지 포함하는 세금이었다. 이것은 일제가 자국 내의 부족한 식량과 군량미를 보충하는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1917년 조선수리조합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식민지 수탈 기구 중 하나였던 수리조합은 해방 이후에도 존속되다가 토지개량조합을 거쳐 1971년 농지개량조합으로 개칭되었다. 수리시설은 철도, 항만, 도로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투자되어야 함에도 농민들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농민들은 조합원으로서의 권리가 완전히 박탈된 채 과중한 수세에 허덕이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 1988년 3월 전남 나주군청 앞에서 열린 부당수세거부 2차 농민대회 모습.

수세는 일 년에 한 번씩 부과되었고, 300평당 수십 kg의 벼를 내야 했는데, 1987년에는 쌀값이 오른 만큼 수세도 올라 전국 평균 23kg에 이르렀다. 물론 벼를 현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환산해서 현금으로 냈다. 작게는 몇 천 평에서 많게는 몇 만 평까지 짓는 것이 논농사이고, 땅의 소유 면적이 아니라 경작 면적에 따라 부과되었기 때문에 수세는 농가에 엄청난 부담이었다.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수세는 87년의 경우 1,000억 원에 달했다.

87년 항쟁으로 민주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농민들의 오랜 굴레였던 수세를 폐지하려는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수세 폐지투쟁은 논농사가 많은 전라남북도에서 주로 전개되었다.

나주의 농군들 일어서다

11월 17일, 봉황면에서 100여 명의 농민이 모여 ‘봉황면 수세거부대책위원회’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나주 지역에서는 12월에 이르기까지 각 면 단위의 조직이 건설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당수세에 대한 교육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이는 다시 지역 농민회의 건설로 이어졌다.

12월 29일의 ‘부당수세거부 나주농민 결의대회’는 농민운동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 대회였다. 군 대책위는 수세 거부투쟁을 어떻게 대중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갈지를 고민했고 결국 나주를 넘어 전국이 깜짝 놀랄만한 대규모 군중집회를 준비했다. 이 날 나주에서 수세 투쟁을 대표하는 유명한 구호가 등장했다. ‘못 내 못 내 절대 못 내 부당수세 절대 못 내’였다. 따라 하기 쉽게 전통적인 삼채 가락에 맞춘 이 구호는 수세 투쟁의 대표구호가 되었는데 이를 만든 이는 나주 투쟁의 주역이자 나중에 나주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내게 되는 신정훈이었다.

농민대회를 위해 나주의 젊은 농민 운동가들은 농가를 돌며 수세 고지서를 수거하고 유인물과 벽보 수만 장을 제작하였다. 방송차량으로 마을을 돌며 대회홍보를 하였으며 대회를 위한 각종 준비를 하느라 실무진들은 집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다.

그리고 대회 당일,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숫자의 농민들이 나주성당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나주농조 조합원이 2만 2천 명이었는데 무려 1만여 명이 대회에 참여한 것이었다. 면 대책위와 각 마을 대책위를 통해서 수거된 수세납부고지서 12,073매를 농지개량조합에 반납하고 10,026명이 서명한 수세폐지와 농조 해체를 내용으로 한 서명용지를 수세 대책위에 전달하였다. 농민들은 ‘농지개량조합 즉각 해체하라’, ‘수리청을 만들어라’, ‘모든 농지개량은 국가가 전액 투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나주농조까지 행진하였다. 엄청난 농민들의 열기에 놀란 농조측은 수세를 강제 징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날 농민대회를 계기로 나주는 수세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세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고 언론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농촌 지역은 어디를 가나 수세가 중심 화제였다. 이후에도 부당수세 거부를 끝까지 관철하기 위하여 대중선전, 서명운동, 고지서 반납, 징수거부 등을 전개하였다.

대중선전으로는 <수세거부소식>지를 발행하여 각 마을에 배포하고 나주농민행동지침 소자보와 ‘못 내 못 내 절대 못 내 부당수세절대 못 내’라는 스티커를 마을마다 부착하며 플래카드 걸기 등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고 대중교육으로서 수세교육을 88년 1월 11일부터 15일까지 9개면에서 1,500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실시하였다. 그리고 수세고지서를 마을별로 모아서 수대위로 반납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1월 18일에는 수세거부에 대한 나주농민의 결의를 농수산부 장관에 발송하였고 1월 27일에는 1만 농민의 서명명부와 ‘수세거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국회와 당시 야당인 평민당에 전달하였다.

이러한 대중선전과 서명운동을 통해 농민대중의 참여폭을 확대하여 1988년 3월14일 재차 ‘부당수세폐지를 위한 나주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 폭력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5,000여 명의 농민이 참가하여 광주·목포 간 도로에서 최고장을 불사르며 ‘농조직원 날뛰어도 부당수세 절대 못 내’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회를 진행하였다. 대회에서 농조로 가자는 결의에 따라 평화적으로 농조로 가는 과정에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발포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11명의 농민들이 연행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나주시외버스 정류장 사거리 앞에서 다시 모여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수세투쟁의 확대

▲ 당시 부착했던 수세거부 스티커.

규모 면에서 수세 투쟁이 가장 크게 일어난 곳은 나주였지만 시기로는 해남이 더 앞섰다. 농민회의 활동이 활발하던 해남에서는 9월 20일 ‘해남농어민의 소리’ 특집호에서 ‘도대체 농지개량조합은 무엇하는 곳인가’, 10월 20일 특집2호에서 ‘농조는 어떻게 운영되고 얼마나 많은 수세를 내는가’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시작하면서 마을단위에서 방송을 실시하고 여기에 모인 농민들과 수세와 농지개량조합에 대해 구체적인 토의를 하면서 마을단위 수세거부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를 토대로 각 면 단위 수세거부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11월 11일 해남군내 각 부락 대표 150여 명이 모여 ‘해남부당수세거부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사전활동을 통해 11월 26일 해남읍에서 3,000여 명의 대규모 대중이 모인 가운데 부당수세거부 결의대회가 열띤 분위기 속에서 개최되었다. 수세거부타령을 개사하여 함께 부르면서 경과보고, 사례발표, 결의문 채택 순으로 진행한 뒤 풍물패를 앞세우고 해남농조까지 항의행진을 하였다. 이후 12월 6일부터 해남군내 전 농민들을 대상으로 ‘부당수세거부 및 농지개량조합해체를 주장하는 해남서명운동’을 시작하고 동시에 수세납부고지서 반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외에도 무안, 고흥, 장성, 영광, 강진, 함평, 보성, 구례, 화순, 곡성, 승주, 담양, 진도 등 전남 각 지역과 순창, 진양 등 전국 곳곳에서 수세 투쟁은 대중투쟁의 뜨거운 열기로 타올랐다. 수세거부투쟁은 이후 지역 간 연대투쟁으로 발전하여 그동안 전북지역에서 수세거부투쟁을 전개해 온 순창수세거부운동과 결합하여 4월 14일, ‘수세폐지를 위한 전남북 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수세거부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던 농민 5,000여 명이 나주천주교회에 모여 대회를 개최하면서 ‘수세폐지’, ‘농민생존권보장’,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전남북 농민들의 수세거부투쟁의 결의를 한층 높였다. 대회에 이어 농민들은 플래카드와 피켓을 앞세우고 농조를 향하여 가두행진을 하던 중 경찰의 무자비한 저지로 다수의 부상과 27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농민들은 굴하지 않고 광주·목포 간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을 하면서 ‘연행농민석방’, ‘농조해체’ 등을 주장하였으나 경찰의 최루탄과 폭력에 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가 철야농성을 벌였다.

1987년 11월 이후 전남지역의 나주, 해남을 비롯하여 전북 순창에서 전개된 수세폐지투쟁은 1988년 11월 1일 ‘전국 수세폐지 대책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전국 62개 군으로 확산되었다. 농민들의 대규모 투쟁에 놀란 정부는 88년 2월 300평당 23~28kg으로 책정되었던 수세를 일괄적으로 10kg으로 인하하였다. 정부는 그것으로 투쟁이 잦아들기 바랐지만 이미 수세의 부당함에 눈뜬 농민들에게는 수세의 완전 폐지가 있을 뿐이었다. 또한 ‘뭉치면 주인이고 흩어지면 머슴이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투쟁이었다. 이러한 자각의 물결이 이후 전농이라는 대중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수세거부투쟁 및 농지개량조합해체투쟁은 농민운동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우선 투쟁준비과정에서 활동가들이 농민들의 구체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일반농민들과 과감히 접촉함으로써 일반농민들을 광범위하게 투쟁에 끌어들였다는 점과 투쟁의 중심을 일반농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마을단위의 수세대책위원회에 두고 이 마을 단위 수세대책위를 중심으로 면단위, 군단위 대책위원회를 상향식으로 결성하면서 일반대중주체의 투쟁을 전개하도록 하였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현장에서 대중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지속적인 투쟁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투쟁방법에서도 요구나 청원 차원이 아니라 ‘수세거부’라는 농민 요구를 관철하는 실력행사로 나갔던 점, 그리고 차량을 동원한 가두방송, 마을방송 등 대중의 정서에 맞는 매체를 사용했던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투쟁선전교육의 과정이 사후교육을 통하며 농민주체조직의 건설과 확대로 나갔던 점은 대중투쟁과 대중조직건설에 있어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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