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한우농가 우보씨의 일일

  • 입력 2016.04.30 10:22
  • 수정 2016.04.30 10:23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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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가금 및 한우 위탁사육 농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기업이 한우에 진출했을 경우를 가정해 극화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허구며 등장하는 사건, 인물, 기업 등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촤르르르…”

벌크에 사료가 들어간다. 한 통, 두 통을 채우고 건너편 축사에서 세 통째를 채운다. 저눔의 것이 다 돈이긴 돈이다만, 어찌됐든 제 논에 물 들이는 소리 싫은 농부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벌크통을 바라보는 우보씨의 미간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사룟값을 걱정하는 수심어린 눈빛이 아니었다. 쏘아보는 듯한 그의 눈빛엔 명백히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사료, 저 사료가 문제다.’

한우 계열화업체 ‘풍류’와 위탁사육 계약을 맺은 지 5년. 우시장에 나가 좋은 송아지를 고를 필요도, TMR을 연구할 필요도 없다. 회사에서 주는 송아지를 회사에서 주는 사료로 키워내면 되니 편하긴 편하다. 그런데….

도무지 등급이 나오지 않는다. 개인소를 키우던 시절 나름 선진농가로 꼽힐 만큼 성적에 자신이 있었던 우보씨인데 이젠 1+등급 받기가 힘들다. 송아지야 편차가 있다지만 한결같이 등급이 안 나오는 걸 보면 의심스러운 건 사료다.

희한한 건 같은 풍류 위탁사육농가인 지역 후배 선창씨는 1+며 1++를 따박따박 잘도 찍어낸다는 것이다. 풍류가 이 지역에 들어올 당시부터 주변 농가를 선도해 위탁사육을 시작한 선창씨는 풍류기업 농가위원장임과 동시에 ‘올해의 풍류농가’ 상을 2회나 수상한 모범농가다. 세가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한우협회 활동을 하면서 그나마 이런저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보씨와는 노선이 다르다.

“자네, 소 몇 마리 분이라도 나랑 사료 한 번 바꿔보세.”

아무래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선창씨에게 이런 부탁까지 해본 적이 있지만 답변은 퉁명스러웠다.

“다 똑같은 풍류사룐걸 뭣한다고 그라요.”

풍류는 고등급 농가엔 인센티브를 주고 저등급 농가엔 패널티를 준다. 소 값이 아무리 좋아도 1+를 받아야 손해를 면한다. 이해관계가 서로 얽히다 보니 상위 농가와 하위 농가가 서로 반목하고 헐뜯기 일쑤다. 적어도 축협 위탁사육만 있던 시절엔 없었던 일이다.

▲ 일러스트 박홍규
사료를 부어 주고 동남씨네 집에 가 보니 벌써 너댓이 모여 오늘도 불평이 한가득이다. 식솔이 없는 동남씨의 집은 늘상 저등급 낙제생들의 아지트다. 요새 더구나 소 값이 바닥을 치다 보니 낙제생들 한숨에 동남씨 집 구들장이 꺼진다.

“소 값 떨어졌다고 사육비를 5천원이나 깎아버리면 농가는 죽으란 거지 뭐여.”

“이 사람아 그건 암것도 아녀. 난 요전에 소 20두 줄이라더니 이번에 10두 더 줄이라 안 하던가.”

“아니 일품기업은 2천두짜리 직영농장 짓는다고 난리던디 소는 왜 농가만 줄인다요?”

“그려어? 축협 생축장 두 개 집어삼킨 게 얼마나 됐다고 뭣을 또 짓는당가? 시펄것들….”

대기업이 유통과 마케팅을 틀어잡자 한우농가는 하나둘 축협을 떠나 기업으로 들어갔다. 농협사료를 비롯한 축산관련 농협 계열사들은 속속 반토막이 났고 이미 농협에 뭔가를 기대하긴 글렀다. 지금 한우농가에게 대기업 위탁사육이란 엉엉 울면서 겨자를 집어먹는 꼴이다.

해는 아직 서쪽에 걸렸는데 지지벌건해진 우보씨가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축사를 지나던 우보씨의 발걸음이 뚝 멈춘다. 흐리멍텅하던 눈알이 밖으로 빠져나올듯 커졌다.

“뭣이여, 이눔들이 왜…?”

분명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소들이 비틀거리고 쓰러져 있다. 벌컥 뛰쳐들어가 보니 몇 놈은 벌써 숨을 거뒀다. 넋 나간 사람처럼 주변을 훑었다. 털썩 주저앉았다.

뭐 때문일까. 전염병이 왔을까. 주사를 잘못 놨나. 아니, 오늘아침 새로 들인 사료가 꺼림칙하다. 분명한건, 우보씨는 소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분명한건, 소가 죽었다. 풍류기업의 소가 우보씨의 축사에서 죽었다.

“부르릉… 끼익.”

차 소리가 났다. 농장 점검을 온 모양이다. 풍류기업 직원들이 왔다. 소 주인이 왔다. 억울을 호소하면 받아들여 질까. 진상조사를 요구하면 제대로 진행이 될까. 취해있는 상태에서 무슨 트집을 잡힐까. 축사 지붕 밖 하늘은 틀림없이 노랄 것이다.

남아있는 소들이 낯선 직원들의 방문에 흠칫 놀라며 뒤쪽으로 몸을 뺐다. 하지만 사방이 울타리, 도망갈 데라곤 없다. 목을 한껏 움츠린 채 떨리는 눈으로 직원들을 쳐다봤다. 우보씨도 똑같았다. 도망갈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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