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의 전개

  • 입력 2016.04.24 10:08
  • 수정 2016.04.24 10:2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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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6월 항쟁과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이어진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여러 모로 개방농정에 대한 전면적인 농민들의 투쟁이 고양될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부는 86년 9월에 우루과이에서 전 세계적으로 농축산물 수출입을 전면 자유화하는 무역협상을 실시하는 데에 합의했다. 가트를 통한 다자간 협상과 미국과의 쌍무협상 등을 통해 엄청난 양의 수입농산물이 들어올 길이 열리고 있던 것이다. 젊은 농민들이 떠난 농촌에는 골프장이나 농공단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노골적인 농업 포기 정책이 시작됐다.

한편으로 87년은 농민투쟁의 전국적인 확산과 자주적 농민회의 출현, 대중운동으로서의 농민운동의 정립 등 괄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진 해였다. 1988년 초부터 농축산물 수입으로 생존권의 위기에 몰린 낙농육우 농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전국 곳곳에서 토지무상양도투쟁, 수세투쟁, 의료보험투쟁, 농산물 제값받기투쟁, 수입반대투쟁 등이 벌어졌다. 무려 270여 회에 걸친 투쟁에 20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동참했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경북과 충북 지역에서는 고추 투쟁이, 전남북에서는 수세투쟁이 격화됐다.

▲ 1988년 11월 17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농축산물 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에서 농민들이 현수막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고추 값을 보장하라!

수입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민들은 타산이 맞는 작물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바로 전 해에 고추 값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면적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역시 전해에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양담배 수입 개방이었다. 밭농사가 많던 경북과 충북 지역은 잎담배 농가가 많았는데 88년이 되자 정부는 담배 종자를 제한하고 작목 전환을 유도했다. 그리하여 88년에 전국 고추 생산량은 전년보다 무려 52%가 늘어난 20만 9천 톤에 달했다. 근당 2,500원 정도 하던 고추는 산지에서 700원까지 떨어졌다. 고추 농사에 생계가 걸려 있는 농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고추 한 근이 커피 한 잔 값이었다.

고추 싸움은 영양에서 시작됐다. 고추 주산지인 영양군 농민들의 생계는 전적으로 고추 값에 달려 있었다. 농민들이 계산한 고추의 생산비는 근당 2,459원이었다. 영양군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시위가 준비됐다. 영양군에서는 네 차례에 걸쳐 시위가 일어났는데 9월 4일의 시위는 규모와 격렬함에서 80년대 지역 농민운동사에 남을 투쟁이었다.

9월 4일, 영양 장날 아침, 좁은 영양 장터로 엄청난 숫자의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위를 준비한 지도부도 놀랄 지경이었다. 모인 농민들의 수가 3,000을 헤아렸다. 성난 농심은 지도부에서조차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농민들은 군청을 향해 진격했고 도경에서 파견한 경찰 병력은 군청으로 가는 다리에 저지선을 쳤다. 영양이 생긴 후 처음으로 최루탄이 터지고 농민들은 토하고 쓰러지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지고 경찰은 준비했던 최루탄이 떨어지고 말았다. 조그만 읍내에서 그토록 격렬한 시위가 일어날 줄 경찰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경운기를 몰고 저지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운전하는 농민을 떠밀어 결국 경운기가 혼자 경찰로 돌진하여 도경 수사과장을 치어버렸다. 저지선이 뚫리자, 수많은 농민들이 군청으로 돌진해갔다. 군청 앞이 꽉 차고 흥분한 농민들은 청사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농민들이 진입하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분노한 주먹으로 군청을 다 부수고도 남을 것이었다.

일단 농민들은 군수가 나올 것을 요구했다. 군수가 나오는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두들겨 맞고, 연행된 농민들을 구출하러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그 때 헬리콥터로 최루탄이 다시 공수됐다. 좁은 골목에 빽빽하게 몰려있는 농민들을 향해 무차별로 최루탄이 터졌다. 경찰의 폭력과 자욱한 최루탄 속에서 쓰러지는 농민이 속출했다. 영양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두 차례 더 이어졌고 결국 세 군데의 가농분회는 현물 납부를 관철시켰다.

이웃한 봉화에서도 농민들의 분노가 거세게 타올랐다. 첫 대회부터 1천여 명의 농민들이 장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투쟁의 기반을 다지고 동력을 얻기 위해 면 단위 집회도 계속 개최했다. 그리하여 고추투쟁은 지역 최대의 현안으로 떠올랐고, 모든 봉화 농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러나 대중적 기반은 마련되었지만, 지역 내에서 벌이는 투쟁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쟁점으로 부각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3차 대회에서는 농민운동 사상 전무후무한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철도 점거였다. 봉화에는 영동선이 지나고 장이 서던 봉화읍에 철도 건널목이 있었다.

여섯 대의 경운기가 철도 건널목 양쪽으로 세 대씩 나란히 섰다. 서울로 향하던 화물차가 건널목 못 미쳐서 멈추었다. 이어서 하행선 무궁화호가 전역에서 출발하지 못한 채 대기해야 했고, 그로부터 세 시간 반 동안 영동선은 봉화 농민들이 점거한 채 불통이었다. 농민대회는 사전에 알려졌지만, 철도를 점거한다는 것은 경찰 당국으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몇 안 되는 전경만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건널목은 농민 300여 명과 가을 농활을 온 서강대, 상명여대 학생 200여 명으로 꽉 찼다.

농민회 깃발과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열차 위로 올라간 농민들은 구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기관사에게 열차를 끌고 청와대로 가자고 요구했다. 농민들의 뜻을 청와대에 알리기 위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도경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는 건널목을 둘러싼 500명의 머리 위로 최루탄을 투하했다. 읍내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농민들과 학생들은 철로에 깔린 자갈을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곧이어 전경들이 들이닥쳤고, 수십 명이 연행되었고 네 명이 구속됐다. 그렇게 1988년 10월 2일은 군 단위 집회에서는 유례없는 강경진압이 행해진 날이며, 봉화에서 처음으로 최루탄이 터진 날로 기록됐다.

봉화 농민들의 투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 중앙당사를 장악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사전답사를 통해 민정당사까지 가는 도로 상황과 경비 상황, 당사 내부구조까지 알아내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다. 화물차 12대에 고추 5만 근을 싣고, 전세 버스를 탄 사람까지 모두 60명이 흩어져서 서울로 향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 12대의 트럭이 일렬로 서서 관훈동 민정당사 앞으로 전력 질주했다. 당사 앞 일방통행 도로에 고추자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11대분의 자루가 다 부려지고 난 후, 뒤늦게 도착한 12호차가 그때서야 부랴부랴 달려온 전경들에게 가로막혔다. 몸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틈을 타 12호차 위로 올라간 농민들이 고추가 가득 든 자루를 부리기 시작했다. 60킬로그램이 넘는 자루가 굴러 떨어지자 전경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바빴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종로서 출입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달려왔다. 그렇게 해서 고추 생산비 보장 투쟁은 전국에 알려지면서 탄력을 받게 됐다.

민정당사 앞은 5만 근의 고추자루로 길이 막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전량 수매라는 농민들의 요구안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버티는 일이었다. 농민들은 화물차에 함께 싣고 간 장작과 시민들이 가져다 준 연탄과 폐가구를 때면서 민정당 의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농성을 했다. 당시 민정당사뿐만 아니라 농협중앙회와 김대중 씨 집 앞에도 몇 십만 근의 고추가 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은 고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11월 17일의 농민대회

그 해 11월 17일 오후 1시에 여의도에서는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및 농산물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전날 밤에 출발하여 이른 아침에 서울에 도착한 농민들이 있었다. 전남 진도와 해남에서 올라온 농민들이었다. 경찰 병력이 모두 여의도 농민대회에 쏠린 틈을 타서 땅끝의 농민들은 기습적으로 농협중앙회를 점령해버렸다. 그리고는 농성에 들어갔다.

여의도에서는 2만여 명의 농민들과 학생, 시민들이 모여 농민대회를 열었다. 농민들은 결의문을 채택하여 ‘농업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미국의 수입개방 압력과 망국적인 개방농정을 물리치고 땀 흘려 일한 만큼의 대가가 충분히 보장되는 생산비 쟁취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갈 것’을 다짐했다. 대회장에는 전국 13개 시도 농민단체와 개인들이 농민의 단결을 뜻하는 대형 그림과 각종구호 등이 담긴 만장과 ‘농민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농축산물 수입 결사반대’ 등이 내용이 적힌 수백 개의 플래카드, 깃발, 피켓 등이 나부꼈다. 참가한 농민들 스스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농민들은 대회가 끝난 오후 2시 반부터 행진을 시작해 4차선 도로를 점거한 채 마포와 아현동을 거쳐 광화문의 미국대사관으로 향했다. 농축산물 수입을 강요하는 미국에 대한 항의였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만은 결사적으로 지키려는 경찰에 막혀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전경 54개 중대 만여 명과 가스 차 다섯 대가 동원됐고 농민들이 돌을 던지며 저항하자 경찰들도 농민들을 향해 돌을 던져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들이 농민들을 연행하자 지나가던 시민들이 경찰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농민들이 무슨 죄가 있냐. 잡아가려면 전두환이나 잡아가라’ 고 시민들이 고함을 쳤다.

시위대들 중에 1,000여 명이 농협중앙회로 몰려가서 이미 농성하고 있던 전남의 농민들과 합세하여 중앙회 9층 건물은 농성 농민들로 가득차고 말았다. 여의도 농민대회와 농협중앙회의 밤샘 농성, 봉화 농민들의 민정당사 투쟁 등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노태우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폭락한 고추를 정부가 수매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단순하게 고추만 일정 부분 수매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농민들은 이제 저 유명한 1989년 2월 13일의 여의도 대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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