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정미소①] 이동 정미소 - 보리도 찧고 벼도 찧고

  • 입력 2016.04.24 00:20
  • 수정 2016.04.24 00:2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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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마력(馬力)’이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말 한 마리가 끄는 힘’이라는 뜻인데, 프랑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서양식으로는 그 단위를 PS라고 표시하는 모양이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1마력은 75kg의 물체를 1초 동안 1m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을 일컫는다. 요즘 사람들은 거의 쓰지 않을뿐더러 잘 모르는 단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1960년대에 시골 벽촌에 살았던 농촌의 꼬마들은 ‘마력’ 따위의 말쯤은 가볍게 입에 올렸다.

“야, 오늘 우리 동네 공터에 발동기가 온대.”

“나락 찧는 그 5마력짜리 발동기?”

“4마력…이라고 하든디?”

“아녀. 보리 찧고 나락 찧는 기계는 무조건 다 5마력이여.”

어쨌든 마을 공터에 이동 정미소가 차려진다. 이제 내일부터 얼마 동안은 그 5마력짜리 원동기 소리가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려댈 것이다. 시끄럽겠다고? 천만에, 신기하고 좋았다. 그것이 <흡입-압축-폭발-배기>의 과정을 거쳐 발동되는 4행정기관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중학교에 가서야 배운 지식이고,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원동기와 정미기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대하는 ‘기계문명’이었다.

첫날은 보리방아를 찧었다. 우리 집은 아침부터 서둘렀으므로 맨 앞 순번이었다. 엄니와 아부지는 물에 불린 겉보리를 정미기 밑에 갖다 놓고 기계가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발동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힘깨나 쓴다는 동네 청년들이 번갈아가며 손잡이를 잡고 원동기 바퀴를 돌렸으나 휘발유 몇 방울만 먹고는 방귀 뀌는 소리를 내며 이내 꺼져버렸다.

“앗다, 이 동네는 기운 신 사람이 이렇게도 는 것이여?”

원동기 주인이 기름통 구멍에 휘발유를 뿌려 넣으며 깐죽댔다. 씨름대회에서 상을 탄 방남이 삼촌이 나서서 발동기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시쿵, 시쿵…탕탕탕…마침내 발동기가 돌았다.

“베리또 걸어!”

용남이네 아버지가 정미기 바퀴에 걸린 피대(皮帶. 벨트)를 끌고 와서 힘겹게 원동기 바퀴 아래쪽에 대어 연결하였다. 드디어 정미기의 바퀴가 돌았다. 현칠이 형이 소쿠리에 담긴 우리 집 겉보리를 정미기의 곡식 통에 붓고는 막대로 자꾸만 쑤셔 넣었다. 겉껍질이 벗겨진 보리가 아래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걸로 기계방아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놈을 받아서 다시 한 번 정미기에 넣고 재벌방아를 찧어야 했다.

엄니와 아부지가 곡식을 소쿠리나 양푼에 받아내고 다시 재벌방아를 찧기 위해 들어 올려 주는 등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이,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으므로(그럴 땐 괜히 거든다고 얼쩡대다가 오히려 지청구를 당하기 십상이다), 동무들이 모여 있는 원동기 쪽으로 갔다. 그때쯤엔 연소가 잘 되어서 배기구 쪽으로 파랗고 예쁜 연기가 퐁퐁 나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 냄새가 싫기는커녕 고소하기까지 했다. 어떤 아이는 아예 배기구 쪽에 코를 들이대기도 하였다. 그 시절 아이들은 너나없이 횟배를 앓고 있었으므로, 뱃속에 든 기생충 때문에 발동기의 연기가 싫지 않게 느껴졌다는 사실을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알았다. 알고 나니 조금 창피하고 기분이 썩 나빴다.

“호박잎 하나만 뜯어갖고 와!”

현칠이 형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갑자기 호박잎을 가져오라고 했다. 기계로 보리방아를 찧다가 웬 호박잎 타령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으나 워낙 다급하게 말했으므로 나는 공터의 담벼락에서 호박잎 두 장을 뜯어다 건넸다. 현칠이 형이 곡식통의 모가지쯤에다 호박잎을 쑤셔 넣고는 다음 차례인 수남이네 보리를 그 위에 부었다. 이윽고 퍼런 물이 든 곡식이 나왔고, 그러자 수남이 아버지가 얼른 자기네 소쿠리를 들이밀어 받았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우리 집 곡식 통으로도 떨어진, 푸른 물이 든 보리 한 줌을 두 손으로 걷어서는 수남이 네 소쿠리에 담아주었다. 엄니가 날 보더니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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