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박꽃같이 곱던 이웃집 누이를 위하여

  • 입력 2016.04.16 21:1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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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내 누이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 그 누이의, 죽고 못 사는 이웃집 동무가 있었다. 이름이 재심이였다. 마재심.

남녘 섬마을의 강렬한 햇살과 바닷바람 때문이었는지 누구 할 것 없이 그을린 얼굴을 하고 다녔는데, 재심이 누님만은 언제나 얼굴이 옥양목처럼 뽀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참 예뻤다. 그 누님이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면 사탕 따위의 주전부리를 가지고 와서 내게 살짝 건네주곤 했기 때문에 난 내 누이보다 오히려 재심이 누님을 더 좋아라 했다. 나는 장난기가 동해서, 마루에 나란히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는 그 누이들의 엉덩이를 징검다리 삼아 날랍게 밟고 도망치곤 했다. 그때마다 누이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재심이 누님은 그저 싱글거리기만 했다.

내가 1학년이고 그 누이들이 6학년이던 해의 어느 가을날, 재심이 누님은 여객선을 타고서 면소재지가 있는, 평일도라는 더 큰 섬으로 건너갔다. 친척도 만나고 5일장도 본 뒤, 다음날 돌아올 것이라 했다.

“잘 됐다. 장에 가서 수실 좀 사다 줘. 노란 실하고 파란 실하고…. 잊어버리면 안 돼.”

“걱정 말드라고.”

누이와 재심이 누님은 그렇게 웃으면서 작별을 했다. 나를 향해서는 ‘오다마’ 사탕도 사 오겠노라며, 지붕에 핀 박꽃처럼 환하게 웃어보였다.

다음 날 저녁, 등잔 밑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는데 우리 집 뒤 고샅으로 웬 사람들이 쿵쿵쿵,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도 들렸다. 나는 날 밟힌 괭이자루처럼 벌떡 일어나서 사립으로 뛰어나갔다. 울부짖는 사람 중에는 재심이 누님의 아버지도 있었다. 재심이 어머니는 아예 넋 놓고 앉아서 고무신으로 길바닥을 두드리며 “재심아!”를 연발하였다.

“배가 뒤집어져서 재심이가 죽었대.” “팽나무 집 재오도 죽었대.” “종철이는 헤엄쳐서 겨우 살았대. 큰 동네 사람들은 서른 명이나 죽었대.”

온 마을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나와서 발을 동동 굴렀다. ‘재심이 누님이 죽었다…죽었다, 죽었다…’ 그날 밤 내내 그렇게 중얼거려 봤으나 난 그 때까지 내 주변 사람을 여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일도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생일도로 건너오다가 중간쯤에서 뒤집힌 그 배는, 정기 여객선이 아니라 이웃마을에 사는 개인 소유의 통통배였다. 농협에 공출할 섬 주민들의 절간고구마를 싣고 건너갔던 것인데, 다음 날 정기 여객선보다 더 먼저 출항하였기 때문에, 고구마 공출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모두 그 배를 탔던 것이다. 작은 배에 사람을 너무 많이 태웠다느니, 술 취한 사람이 키를 잡았는데 갑작스레 방향을 돌리는 바람에 뒤집혔다느니, 청년들 몇 사람만 헤엄쳐 살았다느니, 지나가던 여객선이 구조하러 나섰으나 날이 어두워서 도리어 헤엄치고 있던 사람들을 여러 명 치어 죽였다느니…온갖 말들이 나돌았다.

그나마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희생자가 네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큰 마을인 서성리에서는 30여 명이나 한꺼번에 수중고혼이 되었다. 절간고구마 공출을 위해 갔던 이장, 조합장, 반장 등 마을 일을 맡아보던 사람들도 대거 희생되었다.

배가 섬과 섬의 한가운데 이르러 침몰했기 때문에 수심이 깊어서 당시에는 인양할 엄두를 내지 못 하다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건져 올렸다는 소식을 객지에서 전해 들었다. 10여 년 전에 모처럼 고향마을을 찾았을 때, 팔순 노인이 된 재심이 누님의 아버지는 심한 치매를 앓고 있었다. 사촌형의 말에 따르면 그는, 사십 몇 년 전에 떠나보낸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온 동네를 맨발로 돌아다니기 일쑤라 했다.

당시 나는 뭐가 뭔지 몰라서 재심이 누님을 위해서 눈물 한 방울 제대로 흘려주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년기에 겪었던 그 일은 내 기억속에서도 헤실바실 묽어져 갔는데…2014년 4월, 거기서 썩 멀지 않은 바다에서, 꽃 같은 아이들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어이없는 장면을 목격하면서…재심이 누님의 몫까지, 한정 없이 눈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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