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개방 반대 투쟁의 물결, 86·87년의 농민 투쟁
수입개방 반대 투쟁의 물결, 86·87년의 농민 투쟁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6.04.08 17: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농민들의 항의와 시위가 격화되던 80년대 중반이었지만 철저하게 통제된 언론은 농민투쟁을 다루지 않았다. 86년 9월 1일에 전국적인 동시다발투쟁으로 30군데에서 ‘미국 농축산물 수입저지 실천대회’를 열고 농성과 시위를 벌였는데도 언론에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경향신문에 단 한 문장짜리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

‘한국가톨릭농민회 주최 미국 농축산물 수입저지 실천대회가 1일 상오 11시를 기해 대전, 전주 등 전국 29개 지역에서 열린 데 이어 일부 지역에서는 2일에도 미국 농산물 수입 금지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소식을 듣거나 알 수 있는 수단은 은밀하게 제작하는 유인물이나 팸플릿이었다. 80년대 중반에는 농민들의 유인물 제작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양대 농민조직인 가농과 기농에서 제작한 유인물들을 보면 소위 ‘가리방’을 긁어서 만든 게 아닌 옵셋인쇄가 많았고 그림이나 만화 등을 넣어 시각적인 효과도 높았다. 거기에 다양한 선전 활동이 더해졌다. 마을방송을 활용하고 담벽에 구호쓰기, 전단 배포, 벽보붙이기, 풍물패 공연 등이었다. 이런 노력들로 농민운동은 점점 더 활기를 띠어갔다.

▲ 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에 나선 농민들.

호남농민들의 투쟁

1986년 1월 22일 오전 9시, 강진군에서는 경찰 600여 명이 삼엄한 경비를 서는 가운데 강진군 농협 개관식이 열렸다. 집권당인 민정당 소속으로 국회 농수산분과 위원장인 김식과 농협중앙회장 윤근환 등이 귀빈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식이 막 시작했을 때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며 무언가가 휙휙, 단상으로 날아왔다.

“야, 이 똥만도 못한 놈들아, 똥이나 처먹어라.”

날아온 것은 쇠똥물을 채운 계란이었다. 계란은 날아가서 정통으로 국회의원과 중앙회장에게 맞았다. 귀하신 국회의원과 중앙회장이 똥물을 뒤집어쓰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연히 식장은 발칵 뒤집혔다. 농민들은 즉시 “소값 피해보상”, “농협민주화”, “외국농축산물수입중단” 등을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에 더해 민정당사, 관공서, 농협건물 등 30여 군데에 페인트로 벽서를 쓰고 ‘10만 강진 군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전단을 배포하였다.

전단을 통해 농민들은 “농민은 선진조국의 머슴이 아니다. 빚 때문에 못 살겠다. 농가부채탕감하라. 강진농조는 부당수세 철회하라. 농협 임시조치법을 즉각 철폐하라. 농민조합원 머슴 삼는 호화판 농협준공식 즉각 중지하라” 등을 주장하며 행동지침으로 “우리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강진지역의 모든 농민단체 및 군민들과 연대활동을 전개하며 농민권익을 침해하는 어떤 세력일지라도 배격하며 반농민적 내용으로 일관된 농협 강진군지부 개관식을 전체 강진 농민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모든 양심세력과 연대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농협개관식이 난장판이 되자 경찰은 시위주동 혐의로 김성진, 정종범, 김규식을 연행, 구속하였다.

여기에 대응하여 강진 농민들은 즉각 강진읍교회에서 농성에 돌입하여 가두방송을 통해 시위를 선전하고 농성장에서 ‘강진지역현장문제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쇠똥물 투척시위의 내용과 전개과정을 담은 전단을 제작, 조직적으로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해나갔다.

한편 같은 날 무안, 나주, 영암 등지에 걸친 영산호 주변 간척지 경작농민 700여 명이 서울역 앞 광장에서 5년 예정의 제방공사를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영농을 중단시킨 반농민적 관료행정에 맞서 “농민생존권 보장”, “영산호 주변 간척지 영농중단 철회”등을 외치며 현수막을 들고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여 6명의 농민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연초부터 일어난 이와 같은 농민투쟁에 ‘전남사회운동협의회’는 “농민 살 길 가로막는 군부독재 물리치자”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농가부채 탕감과 소값 피해보상, 외국농축산물수입중단, 농민악법 철폐와 농민기본권보장을 요구한다.

이후 3월에 이르기까지 전남지역 농민운동은 강진, 해남, 함평, 무안 등 각 군 단위별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대중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함평농우회 소식지 <배우고 생각하고 협동합시다>, <민주농민>, 무안기독교농민회의 <전라도농민>, 가톨릭농민회 광주교구연합회의 <전남농민의 소리> 등 각종의 선전매체가 제작, 발행되어 지역 농민대중에게 투쟁을 선전하고 투쟁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 선전활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대중선전 활동과 함께 3월 10일 함평농우회, 가농, 기농연합은 ‘전남지역 농민생존권 확보 및 민주헌법쟁취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남지역 농민투쟁을 담당할 투위를 띄웠다. 농민투위는 선언문을 통해 “농업, 농민의 파탄과 살해의 위협은 농축산물수입을 강요하는 미국과 민정당 군사독재정권으로 인한 것이며 농민투위는 농민의 기본권쟁취와 민주헌법쟁취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 농민 서명운동을 주장했다. 전남 지역 농민들의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면모였다.

농민투위는 대중전단 ‘저지하자! 미국농축산물수입 타도하자! 미국예속정권’을 통해 “군사독재 미국예속정권을 타도하여 농민 살 길 쟁취하자”고 주장하였다. 3월 이후 전남 농민운동은 농민투위를 통해 광범위한 농민대중 선전활동을 전개하면서 투쟁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3월 14일 장흥지법에서 쇠똥물 투척시위 사건 공판 이후 200여 명의 농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또한 농민투위는 4월 4일 제1차 실천대회를 재판을 진행하는 장흥에서 열어 500여 명의 농민들이 ‘군사독재 타도하고 농민생존권 쟁취하자’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장흥경찰서 앞까지 가두시위를 감행하였다.

연초부터 지속적으로 전단, 성명서, 소식지 배포, 벽서 등의 다양한 선전활동을 계속해 온 ‘전남무안농민투위’는 4월 19일 ‘수입개방 저지 및 미국예속정권 타도를 위한 무안농민 실천대회’를 열었다. 100여 명의 무안농민들은 무안 버스정류장 앞에서 500여 명의 정사복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저지하자 미국농축산물수입 타도하자 미국예속정권”이란 구호 제창과 함께 3회에 걸쳐 장시간 가두시위에 돌입하였다. 농민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 온 광주지역 학생들이 버스의 검문검색을 통해 무차별 연행되는 와중에도 농민들은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시위투쟁을 하였으며 당일 오후부터 무안읍 제일교회, 제이교회, 무안읍성당에서 가두방송을 하며 4월 25일까지 무려 7일 간 농성에 돌입하였다.

해남에서는 5월 9일, 해남기농, YMCA농어민회, 해남기독청년회 등 세 단체가 “신민당은 정권야욕 버리고 농민문제 해결하라”, “미국농축산물수입 저지하고 미국예속정권 타도하자”는 현수막을 들고 전단을 뿌리며 군사독재와 타협을 꾀하려는 야당에게 민중의 편에 서도록 각성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 소작 토지를 되찾기 위해 삼양사로 들어가는 농민들을 경찰이 막고 있다.

농민투쟁의 격화

1987년에 접어들면서 정국은 민주헌법쟁취 투쟁으로 모아진다.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사회 각층에서 민주개헌운동이 벌어지고 농민운동 단체들과 운동가들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국농민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여야가 합의하여 만든 개정헌법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천만 농민의 삶과 직결되는 농민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가농과 기농은 임시조치법에 묶여 25년 이상 독재 권력과 재벌의 하수인 역할을 해온 관제농협을 농민이 되찾고 농민의 생명줄인 쌀값을 제대로 받기위한 투쟁에 나선다. ‘조합장 직선제 및 쌀 한 가마니 십만 원 쟁취 투쟁’이 그것이었다.

또한 87년에는 토지투쟁이 거세게 불붙은 해이기도 했다. 고창군 해리면 소작농민 300여 명은 8월 12일, 서울의 삼양사 본사를 찾아가 38년 동안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는 소작답을 내놓으라는 요구와 함께 본관 4층에서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농민들은 농성 기간에 기자회견과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왜곡보도를 일삼는 동아일보사를 찾아가 똥물을 투척하고 지주인 김상협의 집을 방문하려다 농민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8월 24일에는 삼양사 주변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합세하여 시위를 벌이자 삼양사가 고용한 구사대가 시너통을 던져 학생 2명이 중화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기독교 청년학생들이 주도하여 ‘살인미수 구사대 규탄대회’를 열었고 최루탄과 몽둥이가 난무하는 가운데 밖에 있던 농민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농성장으로 들어가 농성에 합류하였다. 삼양사 토지 투쟁은 오랜 싸움 끝에 지주 측에서 농지를 소작농민들에게 매매한다는 내용의 최종 협상 결과를 얻어냈다.

그 외에도 경기도 평택과 전남 무안의 농민들이 간척지 토지의 양도를 위한 투쟁을 벌였고 80년대 후반 농민운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세 투쟁이 여러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8월 30일에는 전남 장성군 남면에서 수세 문제를 두고 공청회가 열렸으며 여기에 지역 농민 150여 명이 참석하여 높은 관심을 보였다. 공청회에서 농지개량조합 측이 명분과 논리에서 크게 밀렸고 농민들은 고무되었다. 이 사례가 알려지면서 전남 여러 곳에서 수세대책위원회가 꾸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대책위가 모여 10월 26일에는 도 단위로는 처음으로 ‘전남수세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6월 항쟁과 민주헌법쟁취 투쟁, 17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 등으로 요동치는 정국 속에서도 농민운동은 더욱 큰 싸움을 예비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