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농사와 함께 자라는 아이들

  • 입력 2016.04.01 14:06
  • 수정 2016.04.01 14:07
  • 기자명 황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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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정미(경북 의성군 봉양면)
집이 비어간다.

큰딸은 대학교 기숙사로 떠나고,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기숙사로 떠나고 나니 이제 초등 3년 막둥이만 남는다. 아이를 키우면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참 우여곡절이 많다. 더더구나 돌봐줄 시어른이 없는 우리는 늘상 아이들을 들로 데리고 다녔다. 그래서 아이들에겐 마늘논이 놀이터였다. 하물며 늘상 마늘논에서 놀던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던 날. 아이는 처음 가는 어린이집이 낯설어 무던히도 울어댔었다. 어린이집 차만 오면 엄마한테 달라붙어 “어린이집 안가고 마늘논에 갈래”라며 기겁을 하며 엄마를 힘들게 했다.

그렇게 일주만에 아이는 자연스럽게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3년 초등 6년 그리고 그 까칠하던 중등 3년은 참으로 나나 둘째나 힘겹게 보냈다. 무슨 말을 못 붙이게 했다. 성적표에 영어 점수가 좀 그렇길래 그냥 나도 모르게 나온 한숨을 쉬어 버렸는데, 그걸 들은 둘째는 “나도 점수가 그렇게 나와 짜증나는데, 엄마가 한숨을 쉬면 내가 어떻겠냐”고 발악을 하며 대든다. 참 기가 막혔다. 나도 무심결에 나온 한숨이다. 엄마는 어쩌라고…. 그렇게 둘 다 서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아들이랑 한바탕 하고 나면 며칠은 힘들다. 그러다 이젠 서로 피하기로 했다.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으므로….

고분고분하던 딸을 키우다 아들 키우기는 버거웠다. 까칠하고 속 좁은 아들은 옛날 일까지 까발리며 나를 자극한다. 엄마는 그때 왜 그렇게 나를 때렸냐고. 촌에서 자란 나는 집안 농사일은 당연히 하는 걸로 생각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들에게 일을 시켰다. 그러면 아들은 자기 집안 일을 하는데도 웬 불만이 그리 많은지, 유일하게 쉬는 주말을 일만 한다고, 다른 아이들은 의성읍에 나가 놀기도 합네 하며 투덜거린다. 그래봐야 PC방 가서 게임이나 할 거면서 말이다. 유난히 뭘 시켜도 겉만 뱅뱅 돌던 아들은 그래서 매타작을 좀 당했다. 그래도 자기도 안다. 그래서 지금 이 정도는 됐다고.

농사일은 항상 바빴고, 아이들은 농사일에 항상 부담이 되는 존재였다. 동네 어떤 어른은 아이 넷 키우는데 하도 아이를 업고 일해서 하나 키울 때마다 포대기가 하나씩 떨어졌다고 한다. 아이 다 키우고 맘 놓고 일하는 것이 소원이셨단다.

그러던 아들이 기숙사로 떠나면서 농사일을 걱정한다. 자기 없으면 누가 하냐고…. ‘아들아 난 니 시키는 것이 배로 힘들었거든’하고 속으로 말한다.

아들이 기숙사로 들어가니 나의 아침은 너무나 평온하게 시작되었다. 악다구니로 깨울 일도 없고 밥맛없다고 투덜거리는 모습 안봐도 되고. 대신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 온다. 이제 교실에 왔다고. 너무나 의젓한 모습에 울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어쩜 이렇게 한순간에 아이가 달라질 수가 있나? 신기하기까지 하다. 더 신기한 것은 중학교때 그렇게 놀던 아이가 실컷 놀았다고 공부를 하겠단다. 이제껏 부반장 한번 못했던 아이가 자처해서 반장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되었단다. 참 아이들은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자라는 모양이다. 부모가 쇠빠지게 일하는데도 자기는 일하기 싫어 겉돌때는 저것이 인간이 되겠나 싶어 더 악착같이 일을 시켰다. 그런 것들이 맘속에 쌓이긴 했나보다.

동네 어른들께서는 말씀 하신다. “새댁, 일은 평생 하고 아이들은 잠시 키운데이.” 그러니 아이들 키울 때 정성을 다해서 키우라는 말씀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맘 속에 자리잡은 농사에 대한 심성들이 자기들이 커 가면서도 큰 부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자랐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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