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농민 대투쟁이 시작되다, 소몰이 투쟁의 전개 (2)

한국농정신문 재창간 10주년 특별기획

  • 입력 2016.03.27 16:11
  • 수정 2016.03.27 16:2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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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이제 우리 농민은 더 이상 속고만 살 수 없어서 농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사회 구현을 위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는 데 대해 정부는 귀 기울여 듣고 사과는 못할망정 관공서 직원들을 총동원하여 평화적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하고 폭력 경찰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깔아뭉개고 있다. 이는 재벌기업과 독재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농민의 희생을 강요하고 묵살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정의사회구현이니, 복지농촌건설이니 하는 것이 겉으로만 내세우는 거짓 정책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우리는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우리의 생존권과 농민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우리 스스로 지키기 위하여……’

위의 글은 1985년 8월 24일에 열린 소값 피해 보상을 위한 전북 부안 농민대회에서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이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내용이다.

소몰이 투쟁은 전국에 걸쳐 스물 두 곳에서 전개되었고 참여한 농민들의 수는 이만여 명이었다. 농민 문제의 심각성을 전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는 계기였고 전두환 정권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광주 항쟁을 짓밟고 등장한 집권세력은 소몰이 투쟁이 격렬해지자 위기를 감지하고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다. 그 중에서 가장 치열하게 투쟁이 전개된 곳으로 손꼽을 수 있는 곳이 전북 부안이다. 부안에서의 진압은 광주 항쟁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야만적이었다.

▲ 기독교 인권회관에서 열린 소몰이 투쟁 보고 대회.

부안의 소몰이 투쟁

부안은 하서면과 변산면에 조직된 농민들의 숫자가 많았다. 부안의 가농 회장인 김동현과 총무 박배진, 전북연합회의 허완 회장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농민들은 부안 장날인 8월 24일에 ‘소값 피해 보상 요구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부안성당에서 열기로 한 대회는 본당 신부의 거부로 다시 등룡리 공소로 장소가 바뀌었다. 어쩌면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외진 시골마을에서 경찰의 폭력은 거칠 것 없이 무자비하게 자행됐다. 대회 저지를 위해 경찰과 행정 관료들, 예비군까지 동원되었고 대회 사흘 전부터 등룡리 일대를 포위했다. 농민회원들이 많은 변산면 모항리는 이미 8월 8일부터 마을을 봉쇄하고 주민을 통제하고 있었다. 등룡리에 미리 끌어다 놓은 소를 끌고 가기도 했다. 대형 트럭으로 길을 막고 백여 명의 공무원들이 동원되어 농민회 임원들을 찾아가 폭언과 협박을 일삼았다. 극도의 불안과 위기감이 감도는 가운데 중학생들이 경찰 진압에 대비하여 돌을 주워 모아 쌓고 화염병을 준비하는 등 대치국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회 당일, 백여 명의 농민들이 등룡리 공소 앞 동산에서 대회를 시작하자마자 경찰들이 쳐들어왔다. 농민들은 소를 앞세워 중장비로 차단된 공소 입구까지 나가 경찰들과 대치했고 중학생들이 모아놓은 돌을 집어던지기도 했으나 경찰에 밀렸고 오히려 경찰들이 돌무더기를 차지해 농민들에게 돌을 던져댔다. 그리고 농민들을 덮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방패와 구둣발로 짓밟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준비한 삶은 국수와 음식물까지 짓밟은 경찰들에 쫓겨 농민들은 공소 안으로 들어가 경찰과 대치했다. 무지비한 폭력과 중학생까지 연행하는 만행에 농민들은 분노했고 분신을 시도하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울음과 아우성, 비명이 뒤섞인 작은 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경찰들은 공소 앞마당까지 진압하여 19명을 더 연행했고 남은 농민들은 공소 안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경찰들이 아예 농민들을 죽일 작정이라는 말까지 들려왔다. 실제로 농성장에 있던 농민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연행 과정과 경찰서 내에서도 농민들은 심각한 폭력을 당했다. 당시의 경과 보고서에는 농민들에게 가해진 만행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화장실에 있다가 끌려가고, 세수를 하고 있던 사람까지 전경이 급습하여 끌고 갔으며 노인, 아주머니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발로 짓이기는 구타를 당함. “성당을 폭파시켜야 한다”, “빨갱이만도 못한 놈들”, “애기를 낳지 못하게 자궁을 밟아버려라”는 등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설을 하며 짓이겼고 허완 전북연합회 회장에게는 “다시는 그런 곳에 다니지 못하게 해놓겠다”며 다리를 끊어버리겠다고 비틀며 무차별 구타를 해 갈비뼈 한 대가 나가고 다리 한 쪽을 못쓸 정도가 되어 입원 치료 중. 김모 자매는 연행 과정에서 아랫배를 걷어차이고 실신, 경찰서에 와서야 깨어났으나 무차별 구타당해 앞니 6개가 뿌리째 상했고 의사 진단에 따르면 뇌파검사를 해야 한다고 함. 최숙자씨의 경우 임신 3개월인데도 배를 발로 차 복통을 일으키고 있어 사산의 위기에 있음. 또한 경찰서에 연행된 사람들은 집단 구타를 당했으며 조사과정에서 노인들까지도 얼굴을 때리며 폭행, 이준희 자매의 경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르는 낫을 목에 걸고 “죽여버리겠다”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협박과 폭행을 당했음.’

한편, 사흘 동안 공소에서 농성하던 농민들은 공소에서도 쫓겨나 뒤편 야산에서 밤을 보내고 경찰의 진압에 대비하여 박배진과 김인술을 도피시킨다. 두 사람은 경찰 손에 넘어가면 죽게 될 거라는 소문이 쫙 퍼져있었다. 두 사람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이서에 있던 농민회원들과 합류했고 부안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에 앞장섰다. 당시를 박배진은 이렇게 회고했다.

“몇 천 명씩 모였어요. 신나게 싸움을 했지. 부안읍에 경찰기동대가 1개 중대밖에 없어. 그걸로 어림도 없지. 농민들이 얼마나 독이 올랐는데. 중대 정도는 단번에 쓸어버리지. 그러니까 전주에서 기동대가 출동해서 막는 거예요. 그래도 농민들이 이겨. 무술경관들, 고놈들하고 붙으면 밀리는데 전경들한테는 절대 안 밀렸지.”

8월 28일에 서울에서 열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시국대책협의회’에 참석한 부안 농민 15명은 부안에서의 투쟁 경과를 보고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9월 4일까지 계속된 농성을 통해 농민들은 정부의 살인적인 진압과 농민 문제를 각계에 알리고 호소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 부안 소몰이 투쟁의 진원지가 된 등룡리 공소.

생존권과 수입농축산물 저지를 위하여

소몰이 투쟁을 통하여 우리 농촌이 피폐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속속 드러나고 일반 대중들까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자 농민운동의 방향 역시 농민생존권과 수입농축산물 문제로 집중됐다. 또한 성당과 교회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농민 조직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군 농민회나 투쟁위원회, 대책위원회 등의 형식으로 생겨난 농민 조직은 전국에 걸쳐 다양하게 조직되었으나 아직 지속적이고 대중적인 확산에 이르기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에 접어들어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면서 농민운동은 한층 발전한 형태의 노선으로 나아간다. 반외세와 반독재 투쟁이라는 전선에 농민운동이 확고하게 위치하게 되면서 농민들은 생존권 투쟁과 수입농축산물 반대 투쟁으로 역량을 모으게 된다.

가농과 기농은 지역별로 실천투쟁을 전개했고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 역시 극렬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력적인 시위 진압과 대량 검거, 구속과 고문이 자행됐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굴하지 않고 싸움을 이어나갔다.

충남 아산에서는 영농후계자인 오한섭이 늘어만 가는 부채에 절망하여 음독자살했고 이에 800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추모제를 지내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사흘 동안 농성을 하며 농가부채, 소값 폭락, 농축산물 수입 등에 대한 요구를 내걸고 싸웠다. 충북에서도 제천군, 영동군, 괴산군 등에서 분노한 농민들이 ‘농민 죽여 미국에 아첨하는 수입정권 타도하자’ 등의 격렬한 깃발을 앞세우고 저지하는 경찰과 치열하게 육박전을 펼쳤다. 안동에서도 4월 16일, 칠백여 명의 농민들이 농민대회를 마치고 경찰의 최루탄과 폭력에 맞서 안동역까지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가 부상을 당했다. 전북과 전남에서도 역시 격렬한 양상으로 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됐다.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던 투쟁에 기름을 부은 계기는 86년 7월 21일 한미통상협상의 일괄 타결이었다. 전면적인 수입개방의 상징으로 양담배가 개방되었고 미국은 자국 내의 과잉 생산 농산물을 위해 농산물 수입개방을 압박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존의 위기에 몰린 농민들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이에 가농을 중심으로 농산물 수입을 반대를 위한 전국 동시투쟁이 계획됐다. 한일합병 국치일인 8월 29일에 ‘미국농축산물 수입저지 운동본부’ 현판식이 거행됐고 양담배 수입 시판일인 9월 1일에 전국 33개 지역에서 동시에 집회와 시위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미리 준비된 지침은 상당히 치밀했다. 농민들의 상징인 경운기를 대량으로 동원하여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고 동시다발로 벌어짐으로서 경찰력을 분산시키며 최종적으로 각 지역의 집회는 서울의 미국 대사관에 집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정치, 사회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전국에서 벌어진 9.1투쟁은 규모뿐 아니라 집회 형식과 내용에서도 이전보다 크게 발전한 것이었다. 민족민주운동 세력 내에서 농민운동의 비중이 크게 높아진 것은 물론이었고 참여한 지역의 수와 대중적인 참여에 있어서도 1946년 10월 항쟁 이후 최대의 전국적 대중 투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 투쟁을 통해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민족민주운동의 영역이 농촌 지역인 시, 군 단위로 확장되었으며 이 같은 투쟁 경험은 이듬해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미·일 경제 침략저지 범국민운동’이 조직됐으며 반미 투쟁의 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민족민주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농민들은 소몰이 투쟁과 수입농축산물 반대 투쟁을 통해 비로소 기본계급으로서의 투쟁력과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이 힘은 이제 농협민주화 투쟁, 농가부채거부, 수세 폐지운동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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