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바탕 나무

  • 입력 2016.03.18 11:47
  • 수정 2016.03.18 11:51
  • 기자명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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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임학을 공부하고 여전히 산판일로 먹고 사는 친정 오빠 덕분에 나무 관련 책은 꽤 들춰본 축이다. 머리 굵어지고, 죽은 말과 글들을 쑤셔 넣느라 꽃과 나무 이름은 자꾸 까먹는다. 돈이 되지 않고 밥이 되지 않으니 자꾸 멀어지곤 한다. 무엇보다 대도시 아파트에 빤한 조경수만 바라보고 살고 있으니 익혔던 나무 이름들은 식물도감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있던 3월, 새로 이사를 온 아파트에 들어서니 꽃향기가 폐부로 훅 들어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경수 중에서도 가장 빨리 꽃이 피는 산수유와 매화 몇 그루에서 이런 압도적인 꽃향기가 풍길 일이 없을 텐데 말이다. 평소에 명절 안부도 전하지 않는 데면데면한 여동생인 내가 대뜸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아파트에 꽃향기가 엄청 진한데 꽃은 안 보여. 대체 무슨 꽃이우?” 

“그거 회양목 꽃이다. 아파트 정원수 바탕 까는 나무. 회양목.” 

다감한 오빠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질문하는 여동생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했다. 

“왜 있잖니, 전지 작업으로 글씨로도 만들고, 울타리도 만들고 하는 그 나무. 아기 키만 하고 이파리도 아기 손톱만하니 작고 다닥다닥한 나무.” 

“아니, 그 나무 이름이 그렇게 우아했어? 반전이네.”

가장 흔한 정원수이지만 그야말로 ‘바탕 까는’ 나무인지라 사람들은 ‘회양목’이란 이름을 잘 모른다고 했다. 반에서 가장 착하고 청소 잘 하고 성실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순한 동창생 같다. 상록수인지라 내내 푸른 탓에 겨울엔 성탄 기념이랍시고 알전구 세례로 뜨거운 겨울을 보내느라 잎이 누렇게 뜨곤 하는, 팔자 드센 나무도 바로 회양목이다. 하지만 봄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숨은 봄의 전령사. 알게 되니 보여서 요즘은 설레는 맘으로 회양목들을 바라보고 다닌다. 회양목에 연둣빛이 돌면 그때가 진짜 봄! 

계절마다 꽃이 피고 지는 순서를 잘 배열하는 것이 좋은 정원사의 자질이라 들었다. 초봄에 산수유와 매화가 지나가다 목련과 벚꽃으로 절정을 이루곤 한다. 늦봄엔 연산홍과 이팝꽃으로 이어지다, 여름 꽃인 능소화와 백일홍이 그 바통을 이어 받곤 한다. 시간차를 두고 피고 지는 꽃들 덕분에 아파트촌에서도 그럭저럭 계절감을 느끼곤 한다. 오빠 말로는 정원수도 유행을 타서 나무 심는 농사도 ‘트렌드’ 분석이 중요하다고 한다. 화려한 꽃나무들이 유행을 타고 계절 따라 저마다의 자태를 드러내지만 그래도 꾸준한 건 회양목이다. 비록 좀 자랄라치면 조경업체에서 상고머리 깎듯이 깡동하게 잘라내지만 말이다. 네 생은 원래 딱 그 정도의 높이로 정해져 있다는 듯이 매정하기 이를 데 없이 잘라내곤 한다. 

난데없는 회양목 타령인가 싶으실 게다. 아직 난초 치고 나무 그릴 나이도 아닌 얼뜨기 연구자 주제에 말이다. 그냥 ‘바탕을 까는 나무’라는 말이 못내 마음을 잡아챘을 뿐이다. 화려한 꽃들을 빛내 주느라 스스로 빛난 적이 없는 회양목. 같은 상록수지만 소나무가 받는 사랑의 백분지 일도 받지 못 하는 나무, 회양목. 꽃을 피워 봄을 제일 먼저 알리고 세상을 향기롭게 하지만 존재감도 없는 나무, 회양목. 딱 이 세상의 농민의 신세와 겹치지 않는가? 

그런데 회양목의 호는 ‘도장나무’다. 누가 뭐라던 꿋꿋하게 자라 목질이 단단해 고급 도장용 목재로 쓰인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꼭꼭 눌러 세상에 내 이름 석 자 대신하는 그 도장 말이다. 본바탕이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바탕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낡디 낡은 말, 그러나 여전한 진리. ‘농자천하지대본’을 회양목에 빗대어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래도 올해도 회양목 꽃향기로 봄을 맞이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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