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농민대투쟁이 시작되다, 소몰이 투쟁의 전개 (1)
80년대 농민대투쟁이 시작되다, 소몰이 투쟁의 전개 (1)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6.03.13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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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17일 오전 11시, 함평 우시장에서 가톨릭농민회 마양분회 회원인 김영천 씨가 2년이나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망치로 때려 눕혔다. 6마리의 소를 키우던 그는 이날 우시장에 소를 팔기 위해 두 마리를 몰고 나왔다. 어미 소와 송아지였는데 송아지는 19만5천 원, 105만원 주고 사서 2년 10개월 키운 어미 소는 45만원에 값이 매겨지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철물점에서 망치를 구해온 그는 소머리를 내리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7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소위 비교우위론을 내세우며 개방농정으로 돌아섰고 외국농축산물을 수입하는 구조적 체계를 구축하였다. 곡물을 비롯한 모든 농축산물을 수입함으로써 농민들은 더 이상 농사지을 거리가 없어지고 이농이 속출했다.

이에 더해 1981년 전두환 정권은 축산을 장려한다면서 뉴질랜드와 캐나다에서 값싼 소를 수입해 농민들에게 팔았다. 농민들은 농협 빚을 내어 소를 샀고 소가 크게 늘어나자 사료 값은커녕 일 년 키운 소가 반값으로 떨어지는, 소 값이 개 값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농민들에게 소를 팔아 이권을 챙긴 정권의 하수인들은 다시 90만 마리 분의 소고기를 수입하여 소 키우는 농민들을 낭떠러지로 떠밀었다. 농민들의 피해는 소 한 마리당 70~80만원, 가구당 300만 원, 전체적으로는 약 2조 원에 달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고 농민에 대한 대책과 보상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마침내 먼저 떨치고 일어난 곳이 경남 고성의 농민들이었다.

▲ 80년대 농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외국농축산물 반대 농민대회 모습.

농민 살 길 농민이 찾자!

1985년 7월 1일,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에서 처음으로 소를 몰고 시위에 나서는 소위 ‘소몰이 투쟁’이 처음으로 전개되었다. 두호리에는 농민운동 초기의 핵심인물들인 이병철과 이호원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의 90%가 농민회로 조직된 곳이었다. 그리고 농민회원들 대다수가 소를 키우고 있었다. 80년대 농민 시위의 한 전형이라 할 소몰이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농민회의 조직력과 튼튼한 지도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약 한 달 정도의 준비를 거쳐 마침내 농민들은 경운기와 수십 마리의 소를 앞세우고 고성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km 남짓 떨어진 고성 우시장이 목적지였다. 미처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 경찰은 겨우 순경들이 나와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분노한 농민들과 소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우시장에 집결한 농민들은 ‘소 피해 보상 및 외국 농축산물 수입 금지’라고 쓰인 대형 플래카드를 걸고 유인물을 살포했다. 지서장과 면장, 정보과 형사들이 나와서 저지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쉽게 목적을 달성했지만 농민들은 거기에서 멈출 수 없었다. 다시 소와 경운기를 몰고 고성군청을 향해 출발했다.

군청으로 향하는 국도에서 뒤늦게 출동한 전투경찰과 농민들이 부딪쳤다. 국도를 차단한 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많은 농민들이 연행되었다. 결국 농민들의 요구가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군수의 약속을 받고 마을로 돌아왔다. 선진적인 고성 농민들은 소몰이 투쟁의 전술에 맞게 많은 구호를 개발했는데 이는 이후에 벌어지는 전국의 시위에 영향을 주고 농민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구호들은 다음과 같다.

‘농민은 똥밭에 재벌은 돈밭에. 돼지똥 밟고 엄마 울고 소똥 밟고 아빠 운다. 농민은 선진조국의 머슴인가. 밀려오는 외국 소에 죽어나는 한국농민. 양키 강냉이 먹고 설사하는 한우. 열나게 일했더니 신나게 수입하네.’

소몰이 투쟁은 여러 모로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이전에 주로 성당 안이나 실내에서 하던 집회와 달리 소를 몰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두로 진출하는 투쟁으로 변했고, 경찰도 소가 날뛸 것을 염려해 함부로 최루탄을 쏘지 못했다. 소몰이 투쟁은 농민들이 경찰 저지선을 쉽게 뚫고 나가 일반 농민과 지역 주민에게 정부의 농업정책과 농민의 억울함을 알리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고성에서 시작된 소몰이 투쟁은 곧바로 전국으로,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80년대 농민대투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두 번째로 격렬한 소몰이 투쟁이 벌어진 곳은 충북 음성이었다. 음성군 무극읍의 천주교회는 농민운동사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남긴 곳이다.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이 해제되기도 전인 82년에 무려 2,000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를 열고 경찰과 대치한 전력이 있었다. 무극 지역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있던 가톨릭농민회는 음성군까지 사십 리 정도의 국도를 소몰이 투쟁으로 돌파하는 기념비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상황을 농민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7월 12일 각 마을에서 경운기가 출발하기 시작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1차 집결지인 무극천주교회 앞에 8시에 집결한 농민회원들은 이날 행사 일정에 관한 간단한 안내를 듣고 음성읍을 향하여 출발했다. ‘소값 피해 보상하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경운기에는 마이크와 가농협의회 기, ‘외국 농축산물 수입 중단하라’는 등의 농민 주장을 담은 만장 20여 개를 걸었으며 소 등에는 ‘개값이 된 내 신세’, ‘똥금된 소값’ 등의 글귀가 쓰인 양곡포대를 둘렀다. 경운기에 장치된 마이크를 통해 농민가와 농민 주장을 외치며 음성읍으로 가는 도중에 세 차례에 걸쳐 경찰과 행정공무원의 저지가 있었으나 과감히 뚫고 나아갔다. 저지선 돌파에는 특히 여성농민들의 역할이 컸다. 무극을 출발한 지 세 시간 만에 음성읍에 도착한 농민들은 깃발을 흔들고 주장을 외치며 읍내를 돌았고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100여 명의 농민과 여덟 마리의 소, 경운기 17대로 이루어진 행렬은 장엄하면서도 비장했다. 어느 노인은 “내가 평생 농사지으면서 가슴에 맺힌 한이 오늘에야 조금 풀리는 것 같소. 참 고맙소” 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즉석에서 농민회원이 되겠다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음성 시가지와 장터를 한 바퀴 돌며 연설과 농민가 등을 부를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 행렬이 한 200미터쯤 되었어. 왕복 80리 길을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어. 그리고 나는 그렇게 싸우는 게 재미있더라고.”

음성 소몰이 투쟁을 주도했던 정용기 씨의 회고다.

▲ 지난해 7월 30년만에 재현된 경남 고성 소몰이 투쟁.

커져가는 투쟁 열기

이어서 일어난 곳은 전북 완주였다. 완주군 고산면 벽지의 농민들은 농토가 적어 거의 모든 농민들이 정부가 권장한 소를 키우고 있어서 피해가 막대했다. 또한 고산은 예로부터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곳이었고 게다가 농민문제에 깊은 고민을 안고 함께 해온 문규현 신부가 있었다. 이들은 한 농가당 두 명과 소 한 마리를 끌고 나온다는 결의를 하고 고산 지역에서만 무려 300여 명의 농민과 소 100마리, 경운기 20대가 참가하였다. 7월 19일에 벌어진 이 시위는 가장 큰 규모였고 양상 또한 격렬했다.

고산면 사무소 앞에서 ‘외국 농축산물 도입 중단과 소값 피해 보상 요구 농민대회’를 개최했다. 소재지에서 먼 마을은 새벽 다섯 시에 출발하여 공무원과 경찰의 저지를 뚫고 모였다. 두 차례에 걸쳐 경찰저지선을 뚫은 농민들은 화산 삼거리에서 부딪친 경찰의 3차 저지선에 맞서 농약을 뿌리며 격렬하게 싸워 밀고 나갔으며 막아서는 청소차를 밀어서 옮기고 경찰 지프 차 세 대를 언덕 밑으로 굴려버리기도 했다. 경찰 바리케이드마저 뚫고 경찰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나 나왔다. 당시를 한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죽을 정도로 맞고 사지가 들려 끌려가면서, 나는 이제 순교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고산 싸움은 치열한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경찰 저지선을 뚫고 대회를 마친 농민들은 면담을 요구한 도지사를 대신하여 나온 도청 국장과 군수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해산했다. 해산을 하며 농민들이 발표한 결의문은 농민들의 투쟁이 더욱 격화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외국 농축산물 수입 저지를 위한 우리의 싸움은 오늘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농민의 주장이 관철되는 대책이 수립되지 않으면 또 한 걸음 진전된 싸움을 전개할 것이다.’

같은 날, 경북 의성과 예천, 상주의 농민들 100여 명도 소 10마리와 경운기 12대를 동원하여 시위에 나섰다. 피해 보상과 수입 중단을 외치며 다인천주교회에서 의성 우시장까지 삼십 리에 걸쳐 소몰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들이 기동버스 6대와 많은 경찰력을 동원했지만 성난 농민들과 경운기, 날뛰는 소를 막아내지 못했다. 청년 회원들이 치열한 육박전을 펼치며 마침내 저지선을 돌파하고 우시장에 진입하였다.

‘수입장관 수출하라’, ‘살인농정 철폐하고 자립농정 이룩하자’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운 경운기가 우시장으로 들어서자 지나가는 차량이 경적을 울리고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경찰이 이미 우시장을 폐쇄시켰지만 시장 안은 3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환호하는 시민들, 풍물패의 풍물소리 등으로 마치 해방구와도 같았다. 상인들은 음식을 제공했고 나중에는 막는 경찰들과도 빵을 나누는 등 이날의 시위는 농민이 가진 고유한 공동체성을 잘 보여준 시위였다.

7월에만 여섯 군데 이상에서 대규모 소몰이 투쟁이 전개되었다. 소를 몰고 시위에 나선다는 발상과 실천은 농민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도심에서의 시위가 도저히 경찰력의 벽을 넘지 못해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경찰 저지선을 가볍게 돌파하는 농민들의 투쟁은 전체 민중들에게 놀라운 일이자 큰 활력이 되었다. 농민운동이 전체 운동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지위가 크게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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