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여성농민도 농민이다

  • 입력 2016.03.12 12:08
  • 기자명 심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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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문희(전남 구례군 마산면)
“혹시 여성의 날 아세요?”

할머니 농부들께 여쭤보니 금시초문이란다. 그럴 수밖에. 누구하나 ‘당신들도 이 땅의 주인이랍니다’ 이야기 해주는 이 없고 내 스스로도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 없는 그녀들에겐 먼 나라의 이야기인 것이다. 여성이 대통령이 된 지난 3년 여성들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이 거꾸로 되돌아 가버렸으니 ‘거봐 그나마 여자들이 하니 더 나아지잖아’ 말하고 싶었던 할머니들은 더욱더 위축되신 듯하다.

며칠 전, 마을 방송을 한다.

“농가경영체 재등록을 해야 하니 면사무소 2층으로, 오전시간이 우리 마을 시간이니 시간 맞춰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바쁘다. 오후에는 다른 마을 사람들이 올텐데. 얼른 나가봐야하는데. 밥 숟가락 놓자마자 남자들이야 쑥 나가면 그만인 것을, 설거지 그냥 불려두고 흙묻은 빨래만 세탁기에 주섬주섬 넣는다.

“당몰댁 택시 왔구만.”

옆집 하사댁의 부르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온다. 숨 넘어가듯 불러대는걸 보니 택시가 벌써 도착했나보다. 할머니 네 분이 짝을 맞추면 군내버스비보다 나으니 장에 가거나 병원에 가거나 네 명이 짝이다. 어쩌다 한 분이 빠지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이번해부터 공동경영주로 등록 할 수 있어요” 말씀을 드렸더니 “그것이 뭣인디? 꼭 해야 하는 것인가? 울 영감이 갔는디?”라신다.

“평생 쎄가 빠지게 농사지었음에도 그냥 농업의 보조자에 농가의 주부로 취급받아온 여성농민들이 이젠 당당하게 농사의 공동경영주가 되는거에요.”

“근다고 뭐 달라지겄어.”

“에고 당몰댁 인자부터 농사의 주인이라 안 하는가. 누가 알아주든 말든 그래도 정부에서 인정해 준다는 것 아닌가 잉.”

면사무소 2층엔 벌써 사람으로 그득하다. 내 차례가 돼서 보니 별것도 없다. 서류 맨 밑 공동경영주란에 그냥 이름 석 자 쓰는 것이 전부다. 새삼스럽게 별 것도 아닌 것을 몇 년째 외쳐 겨우 얻어냈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울 영감한데 한번 물어보고, 서울에 있는 아들한테 전화 한번 해보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결정장애다. 수많은 결정장애를 앓고 있던 그녀들이 이제 스스로 주인되는 삶을 시작한다.

108년 전 미국의 여성노동자가 그랬듯이 행동하지 않으면 여성들의 삶은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농업의 보조자, 농가의 주부가 아닌 여성농민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당당히 적어본다. 투표권이 주어져도 이런 저런 이유로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50%에 달하는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우스운 주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간절함의 표현이었음을, 그 간절함이 여성이 세상의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기틀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 농가경영체 등록에서 여성농민이 농가경영주로 등재되는 것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겠지만 농업의 보조자가 아닌 당당한 공동 경영자임을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차별과 불편부당함을 불편하고 부당하다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여성농민이 농촌 곳곳에서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차별을 없애고 불편과 부당함을 바꿔내는 여성농민이 곳곳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농민 모두가 당당하게 세상의 주인으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농업의 주역으로 설 수 있는 길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여성농민도 농민이다’라는 가장 단순함을 함께 이야기 하자. 그녀들이 이제 밖으로 나온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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