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이라고? 이제는 「집술」이다!

<기고> ‘술 조사’가 떴다 하면 …

  • 입력 2016.03.06 06:39
  • 수정 2016.03.06 06:5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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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이라는 말이 요즘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제법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데, 본래는 없던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밥을 집에서 먹는다’는 것이야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지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바깥에서 식사를 했다. 그래서 외식은 가족의 별난 행사 축에 들었다. 그런데 시절이 바뀌어서 외식을 일상으로 하다 보니 바야흐로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그리워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밥’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렇다면 ‘집술’이라는 말도 있을까? 있었다. 집에서 빚는 술을 일컫는 ‘가양주(家釀酒)’가 그것이다. 탁주, 청주, 약주, 소주 등 여러 종류의 술들은 빚는 방법은 엇비슷했을지라도 집집마다 그 맛이 차이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대중적인 술로 여기는 막걸리 역시 누룩이나 부재료를 무엇으로 하느냐, 얼마 동안 숙성하느냐, 혹은 어떻게 걸러내느냐에 따라서 집집마다 그 맛이 달랐다. 이들 술의 명맥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면 지금쯤 우리의 전통주는 그 종류와 맛이 매우 풍성하고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근대 국가의 통치자들은, 각자의 술을 제멋대로 집에서 담가 마시는 ‘가양주 문화’를 영 불편해 하였다. 바꿔 말하면, 세원(稅源) 확보 방안으로 ‘술’만한 것이 따로 없다고 여겼는데 가양주 상태에서는 징세가 곤란했던 것이다. 마시는 술에 세금을 매기자면 집에서 빚는 것을 금하고 공장제품으로 규격화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주권(主權)을 빼앗은 일제는 결국 세수확보의 일환으로, 다양하게 전승돼 오던 가양주 문화를 말살함으로써, 우리의 주권(酒權)마저 빼앗고 말았던 것이다. 지방마다 고을마다 크고 작은 술 공장(양조장)이 생겨났고 ‘도갓집’이라고 부르는 소규모 술 상점들이 성시를 이뤘다. 이때부터 집안에서 술을 빚는 것은 ‘밀주(密酒)’의 죄를 범하는 일이 되고야 말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니 비극적인 것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도 무려 50년 동안이나 가양주를 금하는 정책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해방이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일제의 전통주 말살정책을 고스란히 세습한 것은, 물론 술에 세금 매기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어지간히 나잇살이나 얹은 사람들이라면 밀주단속 나온 세무서 직원들의 서슬에 쩔쩔 매던 부모님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마치 독립운동 하듯이 집안에서 몰래 술을 빚었던 그 밀주행위를 여전히 감행해야 했다. 양조장의 술은 비싸기도 하려니와 맛이 영 아니었으므로, 몰래 누룩을 만들어 집안 아랫목에 술독을 앉히고는 청주도 뜨고 막걸리도 걸러내 마셨다. ‘술 조사’가 떴다 하면 너도나도 집안의 술독을 들어내어 감추느라 난리법석을 치렀다. 술독을 보리밭으로 내가다가 그만 깨뜨려서 아까운 술을 버리기도 하였고, 누룩을 만들다가 적발되자 만들어놓은 누룩을 다시 절구통에 넣고 찧으면서 “된장 만들던 중이다, 왜?” 하고 따졌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하였다.

1995년에 이르러서야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술을 빚어 마셔도 좋다고 허용이 된 셈인데, 그렇다면 집에서 술 빚는 사람들이 ‘밀주범’의 혐의를 벗었다고 해서, 예전의 다양한 가양주 문화가 되살아났을까? 어림없었다. 그 긴 세월 동안에 우리의 입맛은 이미 공장제품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소주의 경우 증류식이 전통이었는데 5.16 쿠데타 이후 주정에다 물을 타서 희석하는 희석식소주로 양조하도록 강요받았다. 쌀이나 보리나 밀 등의 식량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내 고향마을에서는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었는데 그 희석식 소주의 주정을 만들 원료로서 절간고구마를 대대적으로 공출하였다. 가을이면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서 덕석이며 풀밭 여기저기에 널어 말리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강원도에서 군대생활을 하였는데 밤중에 부대 울타리 너머 뒷집에서 몰래 소주를 사다 마시는 것으로 졸병생활의 애환을 달랬다. 우리들 ‘군바리’들의 입맛은 입대 전에 이미 ‘진로’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런데 뒷집 할머니는 지방 술인 ‘경월소주’ 두 병을 사야 진로 한 병을 끼워서 팔았다. 희석식 소주 중에서도 거의 독과점 품목이다시피 하였던 한 회사의 제품에 모두의 술맛이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전통주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술’을 빚는 가양주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 하지만 공장제 술맛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입맛을 되돌리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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