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농민운동의 기폭제, 무안·함평 농민대회

  • 입력 2016.02.28 19:14
  • 수정 2016.02.28 19:3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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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쌓인 농민운동 역량은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광주민중항쟁까지의 ‘서울의 봄’ 시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인데다 조직화의 정도가 미약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전남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 것이 80년 5월 19일로 예정된 ‘민주농정을 위한 전남농민대회’였다. 상당한 규모로 준비된 대회는 광주항쟁의 발발로 실패로 돌아가고 모든 운동과 함께 농민운동도 몇 년 간의 침체기로 들어간다.

운동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전남 지역의 선진적인 농민운동가들은 끊임없이 대중과 만나교육과 조직 활동을 해나갔으며 당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기독교농민회의 활약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한편 함평을 중심으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농민들의 자주적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한 농민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농우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확대하고 있었다. 엄혹한 정세 하에서 치열한 농민교육을 실천하고 있던 기농과 선진적인 농민들이 마침내 큰 싸움을 준비하게 된다.

1984년은 최초로 대규모 농민 투쟁이 터져 나온 해다. 군 단위에서 착실하게 조직을 강화하고 있던 전남 함평과 무안의 농민들이 주축이었지만 실제로는 전국의 활동가들이 모인 전국대회였다. 처음 논의가 시작된 것은 5월경으로 전두환이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유화국면으로 돌아서고 있던 시기였다. 처음으로 농민대회를 준비하기 시작한 사람은 무안의 배종렬, 함평의 노금노 등이었다. 각기 기독교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를 대표하는 운동가들이었는데 이들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기존의 종교적 울타리를 벗어난 자주적인 대회를 기획하였다.

▲ 1984년 9월 함평, 무안 지역의 농민들은 양파 을류농지세 즉각 철폐, 영세농가 부채 탕감, 농축산물 수입 중단 등을 촉구하기 위해 자주적인 농민대회를 함평장터에서 열기로 기획했다. 군청 및 면사무소, 농협 직원과 경찰들의 폭력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구 함평성당(함평천주교회)에 모인 농민들은 경찰의 진압에 맞서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함평 무안 농민대회가 80년대 농민운동의 기폭제로서 자리매김한 순간이다. 사진은 구 함평성당 모습. 문화재청 제공

투쟁의 전개

날짜는 9월 2일, 장소는 함평장터로 정했다. 장날이면 보통 천 명이상이 장을 보러 나오는 데다 각지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농민을 합쳐 대규모 집회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함평군과 무안군에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고 조직된 농민들만 수백 명에 달했다. 준비 과정에서 유인물을 운반하다가 경찰에 잡혀 다시 인쇄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일로 지도부 상당수가 예비검속을 당하기도 했다. 지도부는 경찰의 검문에 대비하여 전날 밤에 장터 곳곳의 초가집 지붕 밑에 유인물을 감추어 두었다.

안타깝게도 대회 당일에는 새벽부터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핵심 지도부인 노금노 등은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연행되었고 보안이 새나가는 바람에 함평 장터는 천 명이 넘는 경찰이 동원되어 물샐틈없이 막고 있었다. 그래도 농민들은 자꾸만 함평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각지에서 기차를 타고 온 활동가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전남 각지는 말할 것도 없고 전북과 서울 등지에서 온, 주로 기독교농민회에 조직된 농민들의 수가 많았다. 장터에서 농민들과 함께 대회를 하려던 계획이 어려워지자 할 수 없이 함평성당으로 들어갔다. 그 숫자가 천여 명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활동가들과 농민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성당에서 집회를 하고 곧바로 장터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성당에서 밀고 나오면서 대치하고 있던 경찰들과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과정은 집회와 가두진출, 경찰과의 싸움, 연행과 석방투쟁이라는 80년대의 투쟁 형식을 완전하게 보여준다.

경찰은 이 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전두환 정권은 학원가에는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지만 민중들의 시위에는 여전히 잔혹하였다. 경찰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농민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기독교농민회 간사로 서울에서 내려온 허헌중은 코뼈가 부러지는 등의 중상을 당했고 무안의 신기철은 머리가 터져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밖에도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고 연행되면서도 농민들은 함평장터까지 진출하였다. 그 날 발표한 ‘함평·무안 농민선언문’에는 80년대를 관통하는 농민문제 전반이 제기되었다. 그 내용 중에 요구 조건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양파에 부과된 을류농지세를 즉각 철폐하라. 영세농가 부채를 탕감하라. 외국 소 도입으로 망한 소 사육농가의 피해를 전액 보상하라. 농촌청년을 우롱하는 영농후계자 육성제도를 시정하고 자금을 중장기 영농자금으로 바꿔라. 농축산물 수입을 즉각 중단하라. 쌀 수매가를 40%이상 인상하라. 망국적인 저농산물가격정책을 즉각 시정하고 농업생산비를 보장하라. 농협임시조치법을 철폐하고 조합장직선제를 즉각 실시하라. 비농민 토지를 즉각 환수하여 땅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라. 참된 민주정치의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라. 우리의 아들딸인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익운동을 탄압하지 말라. 대일경제 예속을 심화시키는 전두환의 일본 방문계획을 철회하라.>

농민들의 요구를 보면 당시에 가졌던 높은 문제의식을 볼 수 있는데 삼십 년이 넘은 현재까지 여전히 유효한 게 현실이다.

정부는 군청 직원, 면사무소 직원, 농지개량조합과 농협 임직원, 전투경찰, 사복 경찰 등을 동원하여 농민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자주적 집회를 폭력적으로 방해했다. 경찰은 저지를 뚫고 장터에 온 농민들 중 500여 명을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서 귀가시켰다. 농민 200여 명은 오후 3시에 함평천주교회에 다시 모였다. 교회에 모인 농민들은 부당한 탄압에 분개하면서 폭력 경찰을 규탄하고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후 4시경 다시 대열을 정비했다.

농민들이 든 플래카드의 내용은 ‘양파에 부과된 을류농지세 납부거부’, ‘농가부채 탕감’, ‘외국농축산물수입 반대’, ‘추곡수매가 보장’, ‘전두환 방일 반대’ 등이었다. 그들은 함평천주교회를 출발하여 평화적 가두시위를 하며 150여 미터 앞까지 나아갔다. 이때 경찰들 사이에서 “차로 밀어 버려!”, “무조건 두들겨 패!” 같은 명령이 들려왔다. 명령과 함께 400여 명의 정·사복 경찰들이 달려들어 농민들을 곤봉과 군화발로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함평 장터는 전쟁터를 방불했다. 함평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싸움이자 전국에서도 처음으로 일어난 치열한 가두투쟁이었다. 농민들은 온몸을 두들겨 맞으면서도 대열을 흐트러지지 않았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경찰은 방해하지 말라.”

“경찰은 누구의 경찰이냐.”

분노가 폭발한 농민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300미터까지 나아갔다. 경찰은 차량으로 길을 막고 계속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수많은 농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의 폭력과 연행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가까이 가두시위를 벌인 농민들은 거의 모두 잡혀서 40여 명은 연행되고 나머지는 버스터미널에서 강제로 귀가 조치되었다.

연행된 40여 명 중 7명은 불법 구금되고 나머지는 훈방조치로 풀려났다. 불법 연금당한 농민들 가운데 배종렬과 노금노는 광주경찰서로 넘겨져 9월 3일 즉심에서 25일 간 구류 형을 받아 광주유치장에 갇혔고, 주근호, 김성태, 박상문, 백종덕, 신기철 등 5명은 9월 3일 오후 6시에 석방되었다. 그런데 신기철이 불법 구금되어 있는 동안 무안 망운지서장이 마을에 와서 확성기를 통해 “신기철 나와라”는 등 마을 사람들에게 그가 마치 불온한 사람인 것처럼 선전하고 마을을 공포 분위기로 만든 사실을 알고는 이의택, 박승민, 박재신 등과 함께 지서에 찾아가 항의를 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경찰은 이들을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며 무안경찰서로 연행하여 29일간의 구류 처분을 내렸다.

끈질긴 싸움

이러한 경찰의 불법 부당한 폭행과 연금, 구류 처분에 대하여 대책위원회측은 9월 3일과 4일 30여 명의 농민이 함평에 모여 ‘불법 연행한 농민들 석방’, ‘부상자에 대한 치료비 부담’, ‘폭력 경찰의 공개사과’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서장과 정보과장을 면담했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과할 수도 없고 치료비도 부담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한편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교사위원회’ 소속목사 20여 명은 이 소식을 듣고 9월 3일 오후 6시경 함평경찰서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서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이 한 시간 가량 함평읍내에서, ‘죄 없는 농민을 왜 연행하느냐’, ‘불법 구금된 농민들을 즉각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이자 당황한 경찰서장이 8시경에야 나타났다. 목사들은 농민들에 대한 불법 연행과 폭력 행위를 규탄하면서 조속한 석방을 요구했다.

9월 5일 낮 12시경에는 무안경찰서를 방문하여 경찰서장을 면담하고 신기철 등 네 명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오후에는 광주 도 경찰국을 방문하여 항의했다.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와 전남기독교농민회는 9월 20일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200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함평·무안 농민대회 보고대회’를 열었다.

함평기독교농민회, 함평농우회, 무안기독교농민회 등이 주축이 되어 개최한 ‘함평·무안 농민대회’는 요구 내용과 투쟁 방법에서 농민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소극적인 옥내 집회 방식을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목적의식적인 가두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정보 유출로 지도부가 사전 검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농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정확하게 내걸고 싸운 80년대의 선도적 투쟁이었다. 경제적 요구의 상당 부분을 관철시켰고 광범위한 농민 대중의 지지를 얻는 성과도 거두었다.

함평 투쟁의 경험은 곧 전국으로 퍼져나가 이듬해에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소몰이투쟁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농민대회’라는 형식을 제시함으로서 이후 농민운동의 한 전형을 창출해냈으며 연행과 구류에 처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한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함으로서 농민운동의 도덕성과 동지애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투쟁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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