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희망 방정식

  • 입력 2016.02.28 01:28
  • 수정 2016.02.28 01:29
  • 기자명 구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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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점숙(경남 남해군 삼동면)
홍매가 꽃샘추위를 뚫고 소박하고도 당당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딱 이맘 때 어디에 쯤 봄이 오는지 알고자 3년 전에 마당가에 한 그루를 심어 둔 것이지요. 키위 밭으로 가는 마을 안길에는 거무튀튀한 퇴비가루가 조금씩 흘러 있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이른 봄날의 퇴비는 정겹습니다. 아마도 경운기에 싣고 가던 것이 얕게 패인 포장길에 덜컹거리다가 떨어졌나 봅니다. 이제 슬슬 일철이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요즘, 붉게 번진 홍매처럼 농민들도 슬슬 기지개를 폅니다. 꽃 따위는 안 심어도 봄이 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알 수 있는데 철을 모르고는 마음의 사치를 했더니 눈만 호사합니다.

농민들의 한 해가 또다시 시작됩니다. 예전에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농사를 시작했다면, 지금은 걱정 8 기대 2 쯤이라고 보면 될까요? 그것도 과한가? 올봄, 유난히 아픈 농사이야기가 많습니다. 무엇을 심어야 농사가 제 값을 할 지, 1억 매출의 포도농가가 폐원을 결정했다는 이야기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값싼 냉동고추가루 대신 돈이 되는 건고추가루 밀수가 극에 이른다는 이야기, 한우값이 비싼데도 언제 값이 떨어질 지 걱정이 돼서 입식결정이 갈팡질팡하노라고, 나락값 폭락에 나락논을 내놔도 경작해보겠다고 달라 드는 사람이 없다는 노인들의 한숨이 회오리바람처럼 마을의 이곳저곳을 휘감아 돕니다. 이런 농민들과 달리 새삼스레 검은 자동차들이 마을을 돌며 빈집이나 노는 땅 살 수 없냐고 묻습니다. 불경기에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다보니 땅에다가 돈을 묻어둘 모양입니다. 같은 세상 다른 사람들의 풍경입니다. 농민들의 한숨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니 구태여 말할 것이 뭐 있겠냐만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대농은 규모를 더 확장하려, 소농은 이것저것 뭐라도 더 심어보려니 잠시의 틈도 없이 농사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지요.

흔히 하는 위로의 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쥐구멍에도 볕이 들 날 있다고 분명 어디엔가 희망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인데, 잘 보이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어디에 있기는요, 요기 있지. 마을을 잘 가꾸는 민자이장님, 모두를 품어안는 마을공동체, 오는 사람 반기고 가는 사람 기억하는 우리들의 고향 어머님, 좋으나 굳으나 미풍양속을 이어오며 농촌을 지키고 살아가는 농민, 그 중에서도 품 넓고 책임감 있고 야무진 여성농민들에게 희망이 있지요. 허나 아무리 잘 나고 훌륭한 여성농민도 개별로는 그릇된 세상의 큰 물줄기를 거스르기도 돌리기도 어렵겠지요. 개인은 세상 따라 살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뭉치면? 말이 달라집니다. 농가도우미 제도를, 여성농민 조합원가입을, 학교급식을, 여성농민육성법을 만들어 새발의 피 만큼이라도 우리들이 희망을 갖도록 바꿔왔던 것이지요. 지나칠 만치 수용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다보니 가정을, 마을을, 어쨌거나 자기가 소속된 단위를 지키느라 세상의 큰 물줄기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어려워도 제 모양을 하고 굴러가는 것은 아마도 여성의 힘이라고 (이 연사) 크게 외쳐봅니다. 그러니, 그러하니 이제 다음 순서는 그 책임감으로 세상 밖으로 진군을 해야 하겠지요? 여성의 강점은 무엇보다 연대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잘 지내고 주변사람을 잘 챙기는 것이 연대의 참 모습입니다. 여성농민만큼 굳건하게 연대하는 이들이 어딨습니까? 그 힘으로 농업정책을 바꾸자고, 어떻게 바꾸냐 하면 내가 살아온 방식, 우리들이 살아온 방식 속에서 지혜를 구하면 된다고, 잘난 사람만 앞에 나설 것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책임지겠다고 나서야겠지요.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이 있다 보니 우리 스스로 알을 깨 부수고 나서기가 쉽지 않다만, 적어도 농업에 관한 한, 우리 지역에 관한 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는 현자나 위인은 없는 듯합니다. 새봄에 우리의 연대만이 희망이라고 외쳐봅니다.


*이번호를 끝으로 구점숙 여성농민의 글을 맺습니다. 다음호부터는 새로운 필자가 이 코너를 이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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