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거겠지만…”

  • 입력 2016.01.31 17:47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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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 막막합니다.” 귀농 7년차라고 밝힌 40대의 젊은 농부는 쓴웃음만 지었다. 애써 웃음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 뒤로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하우스가 흉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지난 주말 동안 전북 정읍 지역에 쏟아진 37cm의 기록적인 폭설에 포도 시설하우스 13동 전부가 붕괴된 것이다. 뜯기고 찢긴 비닐과 엿가락처럼 휘어진 하우스 철골 위엔 당시에 쌓인 눈이 녹지도 않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기자가 폭설피해 농가를 취재한 지난달 26일엔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의 현장방문도 예정돼 있었다. 피해농민을 위로하고 애로사항을 청취, 신속한 복구 지원을 지시하기 위한 일정이었다. 임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모습이 읽히는 듯 했다. 농협이 이날 배포한 보도자료의 내용도 ‘농협 최원병 회장, 폭설피해농가 현장방문 - 농협 임직원 제설작업 일손돕기에 적극동참’이었다.

그러나 최 회장은 농협 임직원 20여명을 대동한 채 약속시간 보다 40여분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피해농민인 젊은 농부마저 하우스 앞에 나와 최 회장 일행을 기다리며 오랜 시간 서성거릴 정도였다.

피해농민과 함께 무너져 내린 하우스를 둘러 본 최 회장은 마을 이장으로부터 마을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과수분야 국내 최초 유기농 인증 마을이라는 것, FTA 대응 작물로 2015년 12월부터 레드향을 첫 출하하고 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피해 사실의 정확한 파악 및 지원 내용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오가지 않았다. 피해농민 또한 ‘외딴 섬’처럼 멀찌감치 서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최 회장은 홍보 직원의 요청에 따라 임직원과 함께 무너진 하우스 옆에서 제설작업을 하는 ‘포즈’를 위해 수차례 ‘삽질’을 하기도 했다. 피해농민이 보고 있는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연출이라니….

물론, 최 회장의 현장방문에 따라 농가 지원에 힘이 실릴 수도 있다. 최 회장 또한 일정을 마무리하며 돌아가는 길에 피해농민에게 위로금을 전달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일 년 농사를 완전히 망친, 망연자실한 현실을 맞닥뜨린 농민을 위로하는 자리라면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최 회장 일행을 보며 젊은 농부가 남긴 말은 그래서 더 씁쓸하다. “형식적인 거겠지만 … 잘 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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