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농정이 부른 비극, 노풍 피해 보상 투쟁
강제 농정이 부른 비극, 노풍 피해 보상 투쟁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6.01.31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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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연말, 동아일보는 그 해의 10대 뉴스를 선정하면서 그 중 하나로 ‘노풍 벼 사건’을 들었다. 뉴스는 노풍 피해가 230만 섬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목숨을 끊은 농민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던 사건이었다. 노풍이란 통일벼 계통의 쌀 품종 이름으로 그 벼를 개발한 학자의 이름이 박노풍이라는 데서 따온 것이다. 그 해에 보급된 또 다른 품종인 ‘내경’ 역시 개발자인 박래경의 이름을 딴 것인데 두 품종 모두 엄청난 피해를 농민들에게 안겨 주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강력한 식량자급정책에 따라 소위 다수확 품종이 보급되기 시작한 게 70년대 중반이었다. 이름하여 통일벼, 유신벼 등속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다수확 품종이 정부시책이라는 이름으로 농가에 강요되었다.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공무원들이 장화를 신고 와서 못자리를 밟아버리는 거여.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예 매국노 취급을 하면서 윽박지르고….”

당시를 회고하는 촌로의 이야기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에 농민들은 심으라는 대로 통일벼를 심었고 밥맛은 없을지라도 급속하게 수확량이 늘어 1977년에는 쌀 자급이 가능한 4,200만 석을 수확하였다. 이에 크게 고무 받은 박정희 정권은 더욱 다수확 품종 보급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 해 박정희에게는 놀랄 만한 보고가 하나 올라온다. 통일벼 계통으로 이전보다도 50%이상 수확량이 많은데다 밥맛도 좋은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었다는 보고였다. 1단보에 무려 750kg의 수확이라는 놀라운 수치였다. 이는 오늘날의 최대 수확량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니 육종가를 비롯한 대통령까지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바로 노풍의 탄생이었다.

▲ 서슬퍼런 독재 권력에 농민들은 심으라는 대로 통일벼를 심었고, 비록 밥맛이 없을지라도 수확량은 늘어 1977년 쌀자급이 가능한 수확량을 기록했다. 사진은 통일벼 심기 궐기대회.

노풍을 심어라!

신품종 강제 권장은 공무원들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미리 재배 면적을 설정해 놓고 폭력에 가까운 횡포를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시군구의 직원들이 아예 사표를 써놓고 보급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78년은 봄 가뭄이 극심했다. 모내기철이 다 되도록 비가 오지 않아 한 해 농사 걱정이 태산이었다. 자칫하면 겨우 자급자족 수준에 들어선 쌀 농사가 다시 퇴보할 위기였다. 하면 된다는 광신에 사로잡힌 박정희에게 쌀 생산량의 퇴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꿈의 품종인 노풍 벼의 대대적인 보급이 이루어지고 농민들은 시키는 대로 노풍을 심었다. 다수확에 대한 농민들의 열망도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수확이 많이 나오면 수매가가 낮더라도 이익이 되었다. 게다가 통일벼를 훨씬 능가하는 다수확 품종이라는 정부의 말을 어찌 아니 믿을 것인가.

농정지도원들은 또 노풍이 농민을 괴롭혀 온 도열병에 특히 강하다고 선전을 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는 최상의 품종이었다. 그 해 처음 농가에 보급된 노풍이 곡창인 전북지역 전체 재배 면적의 20%이상을 차지했다. 엄청난 홍보와 강제 농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면적이었다. 마산에서는 일반벼를 심은 농민들의 명단을 게시판에 공고하고 그들이 출타할 때 교통편을 제공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려질 정도였다. 특히 도로변에는 ‘노풍단지’라는 이름으로 노풍 외의 다른 벼를 심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극심한 가뭄과 노동력 부족으로 간신히 모내기를 끝낸 농민들이 잠시 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겨우 이삭이 패기 시작할 무렵부터 벼 포기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농약을 들이부어도 소용이 없었다. 정부의 선전과 달리 노풍은 도열병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에 도열병이 발생한 면적은 전 해보다 무려 54배 늘어난 35,907ha에 달했다. 이것도 보수적인 정부발표였다.

긴급한 사태 발생을 두고 가톨릭농민회는 전국 241농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에 들어갔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예 벼 한 톨 건지지 못한 농가들도 속출했다. 가농이 파악한 피해 규모는 농가당 면적은 평균 1,289평, 쌀 20여 가마에 달했다. 이 피해량을 당시 정부 수매가 2등품을 기준으로 하면 농가당 58만 원이었다. 가난한 농가에게 치명적인 액수였다. 농협 빚을 갚지 못해 야반도주하거나 목숨을 끊으려 농약을 마시는 농민들이 속출했다. 강제농정이 부른 끔찍한 현실이었다. 실제로 노풍 피해가 난 이듬해에 농촌을 떠난 인구는 무려 78만 명에 달했다.

이 사태에 대해 정부 당국은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기에 급급했다. 농림부는 이렇게 발표했다.

‘이같이 병충해가 크게 번진 것은 모내기 전에 온도가 높고 햇볕 쬐는 기간이 많아 논의 건토 효과가 생겨 비료를 더 뿌리지 말도록 하였으나, 농민들은 가뭄으로 이앙하거나 벼의 자람이 늦어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비료를 지나치게 뿌려 벼줄기가 약해진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자신들은 제대로 지도했으나 무지한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는 것이었다. 농민을 우롱하는 철면피한 행태에 마침내 농민들이 분노했다.

▲ 대통령 박정희의 강력한 식량자급 정책에 따라 70년대 중반 ‘통일벼’ ‘유신벼’ 등의 다수확 품종이 정부 시책이라는 이름으로 농가에 강요됐다.

강제농정에 맞서 일어서다

정부에서도 노풍 피해 조사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보상을 하기 위한 조사는 아니었다. 일단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워보자는 식이었고 그 과정에서 가농과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는 협박과 회유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에서 내놓은 보상책이라는 것도 형편없는 것이었다. 가장 높은 70%이상 피해 농가에 대한 대책이 약간의 양곡 무상공급과 취로 사업을 통한 피해보상 정도였다.

이는 피해액 대비 10%도 되지 않는 대책이었다. 그 이하의 피해에는 도움이 될만 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게다가 공무원들은 영농지도를 잘못했다는 상부의 문책이 두려워 피해실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피해를 실제보다 줄여서 별 거 아닌 것처럼 보고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1979년 1월 23일. 최초의 피해보상 투쟁이 충남 홍성에서 일어났다. ‘노풍 피해 조사를 공정하게 하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농민들은 홍성읍사무소 광장에서 3시간 동안 집단 농성을 벌였다. 이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농민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문규현 신부가 있던 전북 완주의 싸움은 가장 모범적인 사례였다. 정부가 시행한 완주군의 피해조사는 엉터리였다. 전혀 수확을 하지 못한 농가가 보상에서 제외되는가 하면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도 공무원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보상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가농 회원을 중심으로 농민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정확한 조사와 서명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실제 조사된 피해는 심각했다. 평균 피해율이 81.9%였으나 보상은 5%에 그쳤고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한 농가가 164농가 중 122가구나 되었다. 기관들은 자신들이 조사한 규모에서 자의적으로 삭감을 했으며 피해율을 60%이하로 인위적으로 맞춘 사실도 드러났다.

농민들은 재조사와 제대로 된 보상, 강제농정 철폐 등의 요구를 내걸고 기도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기도회를 열기로 한 4월 9일, 갑자기 예비군 비상훈련이 소집되는가 하면 공무원과 경찰이 동원되어 기도회로 가는 농민들을 막아섰다. 온갖 방해공작이 펼쳐졌음에도 문규현 신부가 집전하는 고산성당에는 700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 날 채택한 성명서에는 강제농정에 대한 통렬한 성토가 들어있다.

‘농업은 국가의 기본 산업인 동시에 농민은 생산자로서 역사의 주체이며, 국민의 실체이다. 또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립은 주권의 주체인 국민 개개인의 존엄을 기반으로 한 국민자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농민을 무시하고 그 기본적 인격마저 짓밟고 한갓 생산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취급하는 이러한 행정은 명백히 관료독재의 망상으로 반역사적, 반국가적 행위이다.’

지금 읽어보아도 명료하고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밀고 당기는 투쟁 끝에 완주의 농민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았고 마침내 1,000만 원의 피해보상과 강제 농정을 하지 않겠다는 전북도지사의 약속을 받아냈다. 농민운동사에 남을 빛나는 승리였다.

“죽어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일은 잊을 수가 없다. 내 평생 농사꾼으로서 인간대접을 받아보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완주군에서 피해 보상을 받은 늙은 농부는 보상받은 돈으로 막걸리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억누르면 억누르는 대로 당하기만 했던 농민에서 당당히 맞서 싸우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해방감을 맛본 농민의 인간 선언이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완주군처럼 농민의 요구를 거의 다 이룬 승리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노풍피해보상투쟁은 정부의 강제농정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을 불러일으킨 계기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농수산부 장관이 물러나고 유신체제에 균열이 갔다는 측면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물론 한 번의 노풍피해투쟁으로 강제농정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노풍벼를 심은 사람이 그 해의 증산왕에 선정되는 코미디 같은 일도 있었다. 80년도에도 강제농정은 심각한 문제였고 80년 5월 19일에 광주에서 계획되었던 농민대회의 이름도 ‘강제농정 철폐를 위한 농민대회’였다.

70년대 말에 벌어진 함평고구마투쟁과 노풍피해보상투쟁은 농민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뚜렷이 인식시켰고 이후 터져 나올 본격적인 농민운동의 전사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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