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재건합시다!”

  • 입력 2016.01.30 18:0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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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모든 길은 ‘재건’으로 통했다. 어느 날 교실 벽면에 ‘혁명공약’이 나붙었는데 그걸 내건 쪽이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였다. 무엇인가 재건을 하려면 삽이나 괭이나 망치를 들고 오거나, 하다 못 해 양회라도 한 포대 둘러메고 와야 할 텐데, 그들은 총과 탱크를 가지고 나왔다. 사람들은 이미 6.25를 겪어서 알고 있었다. 군인은 무섭고, 총도 무섭고, 총을 든 군인은 더 무섭다는 것을. 그래서 ‘재건’이라는 구령 앞에 누구나 고분고분해야 했다.

넝마주이들은 여전히 똑같은 광주리에다, 여전히 똑같은 가난과 남루를 주워 담았으나 어느 날 ‘근로재건대’라는 고상한 명찰을 배급받았다. 군 미필자나 동네에서 주먹깨나 쓰던 형님, 삼촌들은 ‘국토재건대’로 징발되어서 강원도나 제주도로 잡혀갔다. 재건국민운동 실천요강 중에 ‘내핍생활 실천’이라는 게 있었으므로,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에도 쓸 데 없이 커피를 마시거나 빵집에 가서 곰보빵 따위를 사먹지 말고, 건전하게 손을 잡고 하염없이 길을 걷는 ‘재건데이트’를 하도록 권유받았다.

우리 같은 시골 초등학교의 코흘리개들이야말로 교무실로부터 느닷없이 지급받은 ‘재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지 못 하였으나, 어쨌든 날마다 ‘재건’을 하고 또 해야 했다.

“자, 따러서 해봐라 잉, 재건합시다!”

“재건…합세다!”

“야, 이 촌놈들아, ‘합세다’가 아니고 ‘합시다’랑께!”

나는 속으로 담임 선생님을 향해 ‘저도 촌놈인시롱’ 그랬다. 남자 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복도를 걷다가 여자 선생님을 만나 “재건합시다” 그러면 상대편도 “재건합시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연애합시다”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럽게 여겨지지만, 그 땐 그 모습이 참 멋져보였다. 등굣길 교문 앞에서도 “재건합시다”를 주고 받았다. 얼마 뒤에는 그 구호가 너무 길어서 재건사업에 차질이 있었던지 ‘합시다’는 빠지고 ‘재건’만 남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이 제법 근사해 보였으므로, 걸핏하면 어설프게 거수경례 흉내를 내면서 “재건!”이라고 소리쳤다.

마을 단위로 ‘어린이 재건대’가 만들어졌다. 뒷날엔 ‘애향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방학이면 식전 아침마다 아이들이 모두 공터에 모여서 재건체조를 했다. 체조가 끝나면 재건대장인 춘실이가 ‘재건’이라고 쓰인 완장을 멋지게 차고서 출석을 불렀다. 춘실이는 뒷산에 소 먹이러 갈 때에도 그 완장을 차고 다녔다.

춘실이는 어린이 재건대의 대장이어서 완장을 찼지만 그냥 대원인 우리들은 왼쪽 가슴에다 ‘재건’이라고 쓴 리본을 달아야 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검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건’이든 ‘반공’이든 ‘증산 수출 건설’이든 왜 모든 리본의 끄트머리는 제비꼬리 모양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위질을 하다보면 양쪽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이 쪽 저 쪽을 자꾸만 잘라내다가 버리고 다시 하는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종석이네 집에 놀러갔더니 종석이가 어머니로부터 부지깽이로 얻어맞고 있었다. ‘재건’ 리본을 만드느라 빨아놓은 조부님 베갯잇을 잘라서 못 쓰게 만들어버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농짝에서 흰 천을 꺼내 리본 제작에 들어갔는데 펜에다 잉크를 묻혀 글씨를 쓰다 보니 자꾸만 꺼멓게 번져서 헝겊조각을 몇 번이나 더 오려내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 옥양목 천은 아부지의 한복을 지으려고 엄니가 치수에 맞춰 미리 재단을 해놓은 것이었다. 종석이처럼 얻어맞지는 않았으나 낙담에 겨운 엄니의 표정을 대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결국 엄니는 그 다음 장날에 옥양목 한 자를 더 끊어다가 망가진 아부지의 한복을 ‘재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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