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승전고를 울리다, 함평 고구마 투쟁

  • 입력 2016.01.24 19:55
  • 수정 2016.01.24 20:1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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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 고구마 투쟁은 늘 억압받던 농민들에게 정부를 상대로 한 첫 싸움에서 승리의 희열을 맛보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국가톨릭농민회 제공

1976년 가을, 함평군 곳곳 큰길가에는 같은 모양과 크기의 포대가 쌓여 있었다. 60Kg이라고 무게가 표시된 포대들이 많게는 사백 개씩 무더기진 광경은 함평에서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해마다 고구마 수확이 끝나면 트럭이 들어올 수 있는 길까지 농민들은 고구마를 내다 쌓곤 했다. 그러면 농협 트럭이 와서 실어갔다. 전표를 들고 농협에 가서 돈을 찾으면 고구마 농사지어 목돈을 만져보는 소박한 기쁨으로 겨울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 해는 이상했다.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건만 쌓아둔 고구마는 별반 줄지 않았다. 찔끔찔끔 실어가긴 했으나 태반이 남아있었다. 농민이 농협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으랴, 태평했던 농민들 사이에서 걱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뭔 일이래? 날이 자꾸 추워지는데.”

고구마는 사람들의 상식과 반대로 날이 추우면 썩는다. 아침저녁 기온이 쌀쌀해지자 고구마 포대는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제야 놀란 농민들이 농협에 따졌지만 농협은 제대로 된 답변도 없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냥 두었다가는 길가에서 모두 썩어갈 지경이 되자 농민들은 고구마를 사러 다니는 상인들에게 헐값에 넘기기 시작했다. 포대 당 1200원이던 가격이 점점 떨어지더니 나중에는 삼백 원, 이백 원까지 내려갔다.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애초에 농협이 약속한 것은 전량 수매에 포대 당 1,317원이었다. 전 해보다 17%인상된 가격이었고 농협의 독려에 따라 7,000여 농가가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는 주정 원료로 전국 7개의 주정회사에 농협을 통해 납품되고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해 한 해 농사를 망쳤지만 농민들은 한숨만 내리쉴 뿐, 어찌해볼 방도가 없었다. 항의를 해보았자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농민들은 포기했고 농협은 안도했다. 하지만 함평군에는 아직 이름도 낯선 그들, 막 시작하는 농민운동가들이 있었다.

조직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다

11월 23일, 함평읍 청하식당에 모인 17개 면의 농민 20여 명은 거의가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었다. 서경원, 노금노, 임정택, 김한경, 임재상 등이 주도한 이 날 모임에서 고구마 사태에 대해 피해조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가농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농협에서도 재빠르게 대응해나갔다. 경찰과 함께 농민들을 찾아가 각서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은 농사지은 고구마를 형편 상 상인에게 판매했으며 농협에 하등의 이의가 없습니다.’라는 식의 확인서였다. 농협 직원과 형사가 찾아와 협박을 가하며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농 활동가들은 다시 그들을 찾아가 확인서가 허위라는 해명서를 받아가며 피해조사를 했다. 그렇게 수많은 방해와 협박을 뚫고 한 달여 만에 조사를 마친 게 160여 농가에 피해액 309만 원이었다. 투쟁을 주도했던 노금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해 11월 말까지 각 마을별로 조사를 완료키로 했는데, 이런 사정 때문에 12월 31일에야 함평군 전체 7,300세대의 고구마 생산 농가 중 9개 마을 160농가만 조사에 응했어요. 그런 방해 책동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농가가 피해 조사에 응했을 거예요. 활동가들은 수적으로 적고 군 농협 임직원과 경찰, 행정 직원들은 천 명이 넘었으니까. 어쨌든 조사 결과 160농가 손해액이 총 309만원으로 나왔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추정해 보니 전라남북도를 합쳐서 고구마 농가의 손해액이 24억원 정도였어요.”

1977년 1월 9일에는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함평 천주교회에서 2차 대책위원회가 열렸고 농협이 직접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결정에 따라 군 농협 측에 문건을 통해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농협 측은 계속 발뺌을 하면서 경찰과 협력해 대책위원들의 활동을 방해했다. 저들의 분열공작으로 농민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도 하고 송아지 한 마리에 해당하는 무이자 융자를 주겠다는 회유에 투쟁이 물거품이 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가농 활동가들은 모든 위기를 뚫고 마침내 4월 22일, 광주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함평고구마 피해보상을 위한 농민기도회’를 연다. 농민들과 학생운동 세력, 재야 인사 등 500여 명이 모인 이 날 대회에서 농민들은 해방 후 처음으로 폭압적인 국가공권력에 맞닥뜨렸다.

농민들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농협 도지부장을 면담하기 위해 교회를 나설 때는 이미 전경들이 겹겹이 포위를 하고 있었다. 투구를 쓴 전경들과 몸싸움에 투석전까지 벌어지자 교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농민운동가들도 처음으로 해보는 데모인데, 별 생각 없이 따라왔던 순박한 노인들, 아녀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쟁의 기억이라도 되살아 난 듯이 울고불고, 기절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결국 행진을 포기하고 개별적으로 도 농협에 150여 명이 모인 게 저녁 7시였고 이미 문을 닫은 농협에서 농성에 돌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들이닥친 경찰들이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두르며 농민들을 구타하고 연행했다. 이로써 1차 농민집회는 처절하게 깨지고 해산되고 말았다.

대책위에서는 이제 도 단위의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6월 10일 서울 동대문 천주교회, 8월 대전가톨릭회관, 부산 기독학생청년집회 등에 대표를 파견해 고구마 피해보상운동 상황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은 당시 동일방직 사건과 더불어 전국적인 사안으로 부상하게 된다. 사태가 점차 심각해짐에도 농협 측에서는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 사용해가며 운동을 무마시키려 할 뿐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78년으로 넘어오자, 길어지는 투쟁에 많은 피해 농가들도 보상을 포기하고 심지어 함평을 떠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결국 대책위에서는 최후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서 투쟁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4월 24일 광주 북동천주교회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 농민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 함평 고구마 투쟁 당시 정부가 피해보상금으로 내놓은 309만원. 한국가톨릭농민회 제공

우리가 이겼다, 눈물과 환호성

교회에 모인 700여 명은 전국 농민운동 역량의 총집결이었다. 농민뿐 아니라 각계의 민주인사들의 면면은 70년대의 획을 그은 반독재민주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겹겹이 포위한 경찰을 뚫고 가두로 진출하기란 난망한 일이었다. 저녁 여덟 시까지 밀고 밀리는 싸움이 벌어지고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단식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한다. 바쁜 농사철이라 다수의 참가자들은 돌아가고 단식에 들어간 사람은 73명이었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인 농민운동의 첫 세대이자 대표적인 활동가들이었다.

농민들의 단식 소식은 빠르게 퍼져갔고 다음날부터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다. 밖에서는 대학생들이 격렬한 시위와 집회로 농민들을 지지했다. 관에서는 교회의 새벽 미사까지 막으며 탄압에 열을 올렸지만 끝장을 보고 말겠다는 농성자들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물론 생전 처음 해보는 단식이 쉬울 리 없었다. 밥심으로 사는 농민들이 며칠을 굶는다는 게 어디 쉬운가. 사흘째부터 쓰러지는 사람이 생기고 닷새가 넘어가자 계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원에 실려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천주교 사제단이 단식에 동참하고 사태는 급진전을 이룬다. 아무리 포악한 유신정권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반유신 투쟁이 이 사태를 계기로 전국으로 확산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한 중앙정보부가 협상을 제안해 왔다. 그들은 일단 해산 후 해결을 제안했지만 농민들의 요구는 간단명료했다. 돈 내놔라!

단식 7일째, 두 손을 든 정부는 현금 309만 원이 든 봉투를 가지고 왔다. 전달식에서 봉투를 받아든 대책위 임정택 위원장은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농성자들도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만세를 불렀다. 해방 후 처음으로 농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승리한 순간이었다. 만 1년 6개월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은 승리였다.

곧이어 밝혀진 사건의 진상은 충격적이었다. 신문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부정사건’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요약하면 농협이 주정회사와 짜고 무려 80억 원을 횡령했던 것이다. 여기에 연루된 관계자만 중앙과 지역을 합쳐 600명이 넘었다. 지금의 가치로 2천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부정이었다.

농민들이 받은 피해보상은 가구당 2만 원이 되지 않는 적은 액수였지만 함평고구마 투쟁의 의미는 크다. 유신의 몰락을 앞당기는 역사의 한 장이었고 농민운동가들에게는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농협을 상대로 한 다양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거기에 있었다.

‘끈질기게 싸워 이기자!’

함평 고구마 투쟁이 농민운동사에 남긴 귀중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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