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53회

  • 입력 2016.01.22 17:1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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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아도 이상하게 그 해에는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학교에서 내내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던 큰 아들이 읍내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어 하숙을 들여 주었고 마을에는 천호중이가 어깨가 처져 돌아온 것 말고 네 집이나 또 서울로 떴다. 젊은이들이 남아나지 않아서 전에는 뒷짐 지고 물꼬나 보러 다녔을 오십 줄에 든 늙은이들까지 논에 들어가 모를 심었다. 나라는 온통 석유 값이 올라서 비상이었다. 경제가 위험하다고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번호판을 떼어서 관청에 반납하는 일이 줄을 잇기도 했다. 선택도 그 해 처음으로 장만한 포니 자동차를 남들 눈이 무서워 집에 세워두기만 했던 해였다. 

여름에 두 번이나 몰아쳤던 태풍도 대단했다. 두 번째로 8월 하순에 온 태풍은 엄청난 비를 몰고 와서 앞개울의 방죽이 터졌다. 72년 대홍수 때도 버티던 방죽이었는데 그 해에는 속절없이 터지는 바람에 마을 앞 논 여러 배미가 쓸려가 버렸다. 결국 그 해 농사를 그르친 집이 여럿이었고 선택네 논도 한 배미가 쓸려갔다. 물이 빠지고 나서 드문드문 남은 벼 포기 사이에 팔뚝만 한 잉어가 헤엄치고 있는 장면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철없는 젊은이들 몇이 논바닥을 뛰어다니며 삽을 휘둘러 잉어들을 잡는 모습이 기괴한 징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여튼 온통 혼란스러운 해였다. 정치권에서는 야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김영삼이 국회에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지고, 마침내 대통령은 계엄령까지 선포하였다. 부산 일대에서 큰 난리가 났다고들 했지만 자세한 것은 신문에도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이 굳은 얼굴로 계엄을 선포하면서 대국민 담화를 하던 모습,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던 것 같다. 선택은 이상하게 그 모습이 언제까지나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우리는 계속 유신헌정을 굳건히 발전시켜나감으로서 내외로부터의 어떠한 도전과 시련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펼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 3천 7백만 국민의 생존권을 스스로 지키고 날로 치열한 국제 경쟁의 마당에서 우리가 자주국민으로서 긍지와 자신을 가지고……” 

대통령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어쩐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큰 데모가 일어난 게 분명한데 대통령은 어딘지 지친 표정이었다.

‘각하도 나이가 드셨나.’ 

선택은 저도 모르게 혼잣소리를 했다. 이어서 마산과 창원에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공공 건물이 파괴되고 사제 총까지 등장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런데도 읍내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시월답지 않게 갑자기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날씨 탓인지, 이런 일이 생기면 금세 연락이 되어 열리던 반공궐기대회를 한다는 소식도 없었다. 수확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벼 수매가를 22%나 인상한 한 가마 당 3만 6천원으로 책정한다는 고시에도 농민들은 이렇다 저렇다 별 내색이 없었다. 워낙 한 해 동안 물가가 많이 올라서 그 정도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불만이 들려오곤 했다. 선택도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텔레비전에나 눈을 주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선택은 꿈을 꾸었다. 평소에 꿈을 잘 꾸지 않고 깨어나면 곧 잊어버리곤 했는데 그 날만은 생시인 듯 선명했다. 웬일인지 읍내 나가있는 큰 아들과 겸상으로 밥을 먹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서 사방이 깜깜해지는 것이었다. 유난히 정전이 잦기도 했다. 초를 찾아 성냥을 켜는데 한쪽이 밝아지더니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시처럼 앉아서 선택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선택이 다가가자 할아버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미는데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만 멀어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발을 놀려 따라가도 잡힐 듯하다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선택은 할아버지를 부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밖이 어두운 새벽, 밝아오는 날은 10월 2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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