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우리 동네 소 잡는 날

  • 입력 2016.01.17 10:5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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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공동우물 아랫집 기철이네에서 소를 잡았다. 아니, 그 집 소가 죽었다. 먹어서는 안 될 고구마를 먹었다. 덩치가 거대한 암소가 고구마 한 개를 먹고 죽었다고? 그렇지만 사실이다. 우린 그날 저녁, 아니 이후 사나흘 동안이나 소고기 국을 맛나게 먹었다. 이웃마을의 지서 순경들도 소고기 잔치를 벌였다. 그저 소 한 마리가 졸지에 숨을 거두었을 뿐인데, 그 날 저녁 우리 동네 사람들은 온통 쌍장구를 치며 부른 배를 두드렸다. 그것은 비극이면서 희극이었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소 잡는 것을 세 번쯤 구경하였다. 당시에도 요즘처럼 민간에서 도축을 함부로 하지 못 하게 하는 법이 있었을 터, 소를 잡는 일은 매우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소 잡는 것을 처음 구경한 것은 아마 3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재식이네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재식이 할아버지의 1주기를 맞아, 소상(小祥)에 제물로 쓰기 위해 소를 잡는다 했다. 소문을 듣고 종석이와 내가 부리나케 재식이네 집에 이르렀을 때, 이미 칼잡이 어른이 소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돼지의 경우 뜨거운 물을 끼얹고 나서 털을 뽑으면 끝이었지만, 소는 두툼한 가죽을 칼로 벗겨서 말린 다음에 따로 팔 것이라 했다. 아쉬운 것은 살아 있는 소를 자빠뜨려 죽이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으므로 재식이를 사립으로 불러냈다.

“느그 소 쥑이는 것 봤어? 어치케 쥑옜어?”

“어른들이 외양간에 못 들어오게 해서 잘 모르겄어. 기냥 망치 하나만 갖고 들어가든디?”

“소가 힘이 겁나게 씬디, 쬐끄만 망치로 어치케…?‘

“으음, 그랑께 망치로, 요짝 뿔하고 저 짝 뿔 새다구에 있는 숨골을 탁 치면…”

재식이가 내 뒤통수께를 손가락으로 톡, 짚었다. 나는 놀라서 옴찔, 뒤로 물러섰다. 그 뒤로 나는 동무들이 내 뒤통수 근처를 만지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그 소를 한참 해체하고 있을 무렵에 하필 체보(우체부)가 전보를 가지고 왔다. 그 전보는, 서울에 사는 재식이의 누나가 조부님 소상에 오지 못 해서 죄송하다는 내용이었으므로 별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도, 어른들은 그 외지인의 출현에 안절부절 못 했다. 결국 앞다리 하나를 체보에게 들려서 윗마을 지서에 갖다 주라 했다. 당시 시골마을 지서는 소의 도축을 허가할 권한은 없었으나, 민가에서 함부로 도축하는 것을 적발할 끗발은 있었으므로, 소를 잡는 경우 하다 못 해 고기 몇 근이라도 갖다 바쳐야 뒤탈이 없었다.

내가 두 번째로 소 잡는 광경을 목격한 것은 단짝 동무인 종석이네 소를 잡을 때였다. 그 소가 죽은 것은, 종석이에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었다. 뒷산에 소를 끌고 갔다가 그냥 놓아 먹였는데, 그 녀석이 언덕바지 바위틈에 빠져서 한 쪽 다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그 날 종석이는 부모님으로부터 된통 꾸지람을 듣고서 나한테 찾아왔는데, 우리는 마당의 짚 벼늘 뒤쪽에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우물가에 사는 기철이네 소야말로 어이 없이 죽었다.

‘부리망’이라는 게 있었다. 쟁기질을 할 때 소가, 근방에 있는 풀이나 작물을 먹지 못 하도록

주둥이에 씌웠던 새끼줄 그물을 이름이다. 그런데 기철이 아버지는 그걸 씌우지 않은 채로 고구마 밭을 갈았다. 쟁기를 끌고 가던 소가 큼지막한 고구마 하나를 입에 물었다. 바로 그 때 기철이 아버지가 고삐를 낚아채면서 “이랴!” 하고 소리쳤고, 그 고구마가 그만 그 암소의 목에 걸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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