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52회

  • 입력 2016.01.15 11:55
  • 수정 2016.01.15 11:5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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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일생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해, 1979년 기미년 새해가 밝았다. 선택은 새해 첫날을 변소에 들락거리며 종일 누워있다시피 했다. 전전날 종무식을 하고 직원들과 술을 마신 데다 전날인 일요일에도 술자리가 생겨 그다지 즐기지 않는 술을 이틀 연속 마신 끝에 탈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꿀물과 동치미를 번갈아 마셔가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매 시간 대통령이 발표한 신년사와 휘호가 화면에 나타났다. 올해 대통령이 한자로 쓴 휘호는 ‘총화전진’이었다. 

‘하, 글씨 한 번 매섭다. 저런 박력이 있으니까 위대한 대통령이 되는 거지.’ 

선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 밑에서 붓을 좀 잡아보았기 때문에 글씨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대통령의 글씨는 그야말로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글씨였다. 청와대에서 신년을 맞아 찍은 사진 한 장도 화면에 자주 비쳤다. 정원 의자에 양복 차림의 대통령이 앉아 있고 옆에 한복을 곱게 입은 영애 박근혜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하이고, 근혜는 육영수 여사를 쏙 뺐구만. 아직 서른 안짝일 텐데 어찌 저렇게 즘잖해, 안 그런가?” 

선택이 옆에 있던 아내에게 동의를 구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보탰다. 

“그러게요. 근데 시집은 안 가나? 여자 나이 서른 넘기믄 노처녀 되는데.” 

“가겄지. 각하도 얼른 손주를 봐야 적적하지 않고 좋을 텐데 말여.” 

그 날 선택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육여사를 꼭 빼닮은 근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을 하면 어떨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하긴 여자가 대통령을 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런 생각이 스쳐간 건 사실이었다. 삼십 년도 더 지나 선택은 이 새해 첫 날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게 된다. 

“그나저나 오늘 여자의 얼굴 한대요?” 

아내가 요즘 빠져 있는 연속극을 선택도 드문드문 따라보기도 했다. 

“오늘 새해 첫 날이라 모르겄네. 우리 내일 읍내로 영화나 보러 갈까?” 

▲ 일러스트 박홍규

선택은 아내와 일 년에 두어 번씩 영화를 보러 다녔고 아내는 그것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농촌 마을에서 부부가 나란히 영화를 보러간다는 것은 여간해서 없는 일이었다. 선택 역시 가끔 영화를 보면서 예전 서울 생활을 떠올려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영화를 보고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가. 돈이 없어 자주 보지는 못했어도 오드리 햅번이나 비비안 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가슴 설레었던 기억이 한 편에 남아 있었다. 

“그러실라우? 그 영화 지금도 한다고 하던데.” 

“무슨 영화? 농협 벽에 붙은 거 보니까 아랑 드롱 나오는 영화 한다고 하던데. 암흑가의 두 사람인가 하는.” 

“그래요? 난 아직 별들의 고향 하는 줄 알았네.” 

아내는 꽤나 서운한 눈치였다. 지난달에 아내가 먼저 영화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삼십만 관객이 들었다고 호들갑을 떨던 ‘별들의 고향’이라는 영화였다. 

“한국영화치고 볼만 한 게 언제 있었나. 뺀질뺀질한 신성일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한 마디로 자르자 쀼루퉁해지던 아내였다. 같이 다니긴 해도 영화 취향은 서로 맞지 않았다. 

“참, 얼마 전에 서울로 갔던 재숙이네가 다시 온다고 하대요.” 

재숙이라면 이년 전에 마을을 뜬 천호중이 큰 딸 이름이었다.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누가 그래? 어째 나도 모르는 일을 임자가 먼저 아는가?” 

“나도 어제 들었어요. 논 팔아서 가더니 얼마 안 가 홀랑 까먹은 모양이에요. 자세히는 몰라도.”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더니 그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렇잖아도 천호중이처럼 땅만 파먹던 농투성이가 서울살이를 해나간다는 게 어림이나 있나 싶었다. 말리던 선택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을을 떠나더니 고작 이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 모양이었다. 두고 간 농토가 남아있으니까 비빌 언덕은 되겠지만 꽤나 각다분한 신세가 될 것은 빤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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