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무기력에도 자격이 있다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보면서

  • 입력 2016.01.15 11:54
  • 수정 2016.01.15 11:59
  • 기자명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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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내 주거래 은행은 농협이다. 짧게 끝났지만 오래전 잠깐 하던 월급쟁이 시절에 급여통장이 농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관공서의 주거래 은행이 농협인데다 학교마다 지정하는 스쿨뱅킹이 농협이어서도 그렇다. 게다가 농촌지역 곳곳을 훑고 다니는 일이다보니 아무래도 지역에서 돈 뽑기가 제일 편해서 이기도 하다. 

얼마 전 딸아이 통장을 재발급 받으려고 동네 농협에 들렀더니 여기는 중앙회이고 ‘회원조합’으로 가야 한단다. 도시내기로 그저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농협에다 통장을 만들었는데, 기억도 안 나지만 무려 5천원이나(!) 출자를 했던 모양이다. 물어물어 이제 흔적도 없는 ‘구’ 축협에 가서 통장을 갱신하고 돌아오면서 짜증을 섞어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뭐가 이리 복잡해. 이걸(중앙회인지 단위조합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다고.” 

처음 간 곳에서 업무 처리가 원활하게 되지 않은 데에 대한 짜증이지만, 농협의 본질이 본래 은행이 아니라 협동조합, 그것도 농민들의 협동조합이라는 걸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이나 되겠는가. 그야말로 이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농업농촌, 무엇보다 농민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넘치는 동료들도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농협은 “포기했다”다. 농민의 이해관계가 아닌 정치와 지역토호의 이해관계에 따라 엎어지고 메쳐진 채로 이렇게 흘러왔다. 민족자본의 은행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 민족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 맞기는 한 건지. 

지난 12일 농협중앙회장 선거가 끝이 났다. 엄혹한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 초중학교를 다녔어도 반장 선거는 직선제로 치렀다. ‘교실의 면학 분위기 조성’이라는 씨알도 안 먹힐 선거공약이긴 하지만 반장 후보의 연설과 포부는 들어보고 찍었다. 그런데 그런 연설도 없는 선거, 1대 1백도 아니고 1대 1만의 선거. 전체 231만명의 조합원 중에서 292명의 대의원들이 뽑는 체육관 선거가 여전히 있으니 그게 바로 농협중앙회장 선거다. 

많은 이들, 아니 어쩌면 내 주변만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선거에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농협중앙회장 후보가 있었다. 따 놓은 당상인 지역농협 조합장 자리를 박차고 농협중앙회 개혁을 정책으로 내건 농민운동가 김순재 후보가 보기 좋게(?) 낙선을 했다. 아쉬움과 위로를 건네자고 쓰는 글은 아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이제 화석이 되어버렸다는 농협중앙회 선거에 ‘송곳’처럼 한 명은 뚫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 선거는 이전의 농협조합장 선거와는 조금 결이 달랐다. <좋은농협만들기운동본부>가 제시한 농협개혁안에 후보들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김순재 후보가 그 중심에 섰고 당선자 김병원 농협중앙회장도 운동본부가 제안한 정책에 동의를 표한 상태다. 농협개혁을 전면에 내세운 김순재 후보가 얻은 표는 5표다. 초라한 득표수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 대의원의 1.7%의 비율이다. 농협중앙회장 선거에 투표권을 가진 농협 대의원은 전체 조합원 대비 0.0001%이다. 그보다는 훨씬 더 높은 수치이지 않은가. 어차피 1대 1만의 선거, 그 정당성과 권위는 이미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농업 문제는 곧 농협 문제다. 농협을 바라보는 무기력이야말로 저들이 원해왔던 것이다. 그 무기력의 증거로 21세기 복판에 간선제가 버젓이 굴러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농민들도 연구자들도 포기하는 게 속 편하다 여겼던 농협. 그런데 이름도 순진해빠진 ‘좋은농협’을 만들겠다고 본부를 차려 꿋꿋하게 활동을 이어온 <좋은농협만들기운동본부>와 김순재 후보의 송곳 같은 행보들이 작은 균열을 만들어낼 것이다. 무기력으로 그 균열을 메워버리지는 말자. 무기력에도 자격이 있다. 싸워 본 자들의 자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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