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돼지 오줌통을 차고 놀았다

  • 입력 2016.01.10 01:57
  • 수정 2016.01.10 01:5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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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중학시절, 한 울타리에 있던 농업고등학교 축사에 구경 갔다가, 영국의 ‘요크셔’에서 건너왔다는 돼지를 처음 봤을 때 두 가지가 놀라웠다. 우선, 그 도야지 녀석은 조부님 수염 같은 흰털로 치장을 하고 있어서 ‘돼지 털은 검다’는 내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또 한 가지는 무지막지한 덩치였다. 농고생들이 실습시간에 먹이를 많이 먹인 탓인지는 몰라도 그 크기가 마치 ‘다리 짧은 암소’를 본 느낌이었다. 녀석들은 네 다리로 제 체구를 지탱하기도 힘겨운 듯 자꾸만 뒤뚱거렸다. 걸핏하면 허술한 우리를 훌쩍 타고 넘어 배추밭으로 달아나곤 하던, 옛적 내 고향 집의 날렵한 돼지에 비교하면, 요크셔라는 그놈은 그냥 육중한 고깃덩이로만 보였다.

초등학교 시절 내 고향집에서 기르던 돼지는, 어지간히 큰 어미라 해봐야 2백 근을 넘지 않았다. 우리 집의 경우 새끼를 칠 때까지 길러본 기억이 없다. 중돼지쯤으로 자랐다 싶으면, 이 마을 저 고을을 돌아다니는 돼지 장수들이 찾아와서 팔라고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그때그때 팔아서 비료 값도 대고 농약도 샀다.

사람 먹을 양식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너나없이 빈한하였으므로 여러 마리의 돼지를, 그것도 어미가 되도록 키워서 새끼를 치고 할 여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돼지 사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밥 지을 때 나오는 뜨물에다 삶은 고구마 몇 개,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 푸성귀 부스러기 따위가 돼지가 일용할 양식이었다. 물론 그 도야지 녀석들 때문에 나도 좀 고달팠다. 매일이다시피 엄니에게 등 떼밀려, 낫 들고 망태 메고 풀을 베어 날랐던 것이다, 나는 돼지 우리에 풀을 넣어줄 때마다 작대기로 녀석의 엉덩짝을 치면서 꼭 한 마디를 했다. “요놈의 도야지 새끼!”

‘돼지 멱따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는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죽음직전에 이른 돼지가 질러대는 단말마의 비명인데, 그 소리가 하도 크고 요란해서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렸다. 어른들은 마을의 대소사를 훤히 꿰고 있으므로 돼지를 잡는 연유를 안다.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을 앞뒀거나, 혼례나 회갑 잔치가 있거나, 장사를 치르거나, 외지에 나가 출세한 사람이 돌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한 턱 낸다거나….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몇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고기 묵은 지도 오래 됐는디 돼지나 한 마리 잡세!”, 하고 즉석에서 일을 벌이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 잡는 돼지는 몇 십 근짜리의 작은 놈이었다.

돼지 잡는 현장은 아이들에게도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남자 어른들이 돼지의 사지를 나눠 잡고, 요동치지 못 하도록 몽둥이로 누르고, 칼로 멱을 따고, 끓인 물을 온몸에 끼얹고 나서 털을 뽑고, 칼잡이가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하는 과정을 어른들의 가랑이 사이로 훔쳐보면서도 무섭다고 도망치는 남자아이는 거의 없었다.

“자, 요놈 갖고 가서 놀아라.”

칼잡이가 아랫도리 창자 사이에서 오줌통을 뚝 떼어 주인집 아이에게 건네면, 우리는 그때에야 물러나와 그 속에 바람을 채워서 던지고 차고 하며 놀았다. 오줌통은 매우 질겨서 풍선과는 달리 좀처럼 터지지 않아 좋았다. 한번은 우리 집에서 돼지를 잡아서 오줌통이 내 차지가 되었는데, 아이들과 가지고 노는 중에 회오리바람에 휩쓸려서 그만 높다란 팽나무 가지에 걸려버렸다. 눈물이 났다. 다음 날 가봤으나 종적이 묘연했다.

지금도 유년시절을 돌이킬 때면 그 때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것이 ‘풍선’이라면 모를까, “그때 높다란 팽나무 가지에 걸려 바람에 살랑거리던 ‘도야지 오줌통’이 눈앞에 삼삼하다”, 이렇게 말하거나 혹은 글로 쓴다면 “쯧쯧, 문학을 한다는 사람이…” 하며 흉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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