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모습-그 이중성에 대하여

강정남(전남 나주시 봉황면)

  • 입력 2008.03.01 20:00
  • 기자명 강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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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남 전남 나주시 봉황면
요즘처럼 경제란 낱말이 상종가를 날리는 때도 없을 것이다. 경제, 그러면 실물경제, 거시경제, 미시경제... 참, 단어들이 많다. 그리고 요즘, 전 세계를 휘청이게 만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서부터 정작, 갈곳 없는 미국의 투기자본들은 기름과 곡물로 몰려다니며 전세계 물가를 폭등시켜 버렸다. 물론 그만큼의 이익은 확실히 챙기면서 말이다. 남이야 위험에 처해있거나 말거나 자기 주머니만 차면 그만이다. 그게 경제인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돈을 쫓아가지 말고 돈이 자기를 쫓아오게끔 하라!” 그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니 결국은 사람의 문제인 것 같다. 돈의 방향이 사람으로 향할 때 비로소 돈의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있고, 그래야만 경제의 가치가 사회에 부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경제가 사회가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길로 가는데 어느 누구도 붙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목적이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이윤, 이윤일 뿐이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자를 수 있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정규직을 쓸 수 있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형편없는 국내식량 자급도는 팽개칠 수 있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광우병위험에 노출된,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먹고 죽어도 되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뭐든지 괜찮댄다.

자본은 그 무거운 이윤을 업고도 모자라다고 미치고 날뛰고 있다. 이제 자본은 제어가 되지 않는 커다란 암초가 되어 우리들을 이끌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구멍 난 배에 모두 싣고 떠나갈 뿐이다. FTA를 하나 하나 체결하면서 죽음으로 갈 뿐이다.

정치권력과 하나 되어 위장된 경제의 얼굴은 마치, 신의 얼굴이라도 된 것 같다. 경제만 살리겠다면 뭐를 하던지 용납이 되고 이해가 되니 말이다. 그러나 자본 혼자서는 그 생명을 연장 할 수 없다.

어떻게든, 노동과 결합될 때 자기 가치가 부여되고 부의 원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것을 교묘히 은폐할 줄 안다.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위장된 경제- 그래서 이젠, 우리의 경제를 얘기해야 된다. 쌔가 빠지게 일하고도 항상 빈털털이 불안한 경제는 제발 집어치우라고 해야 한다. 너희들이 얘기하는 경제는 다 거짓이라고 이야기하여야 한다.

이제 무조건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자. ‘우리의 경제’가 살아야 한다. 노동하는 경제가 살아야 하며 농사짓는 경제가 살아야 하며 서민의 경제가 살아야 한다. 동맥경화에 걸려 터지고 말 잘못된 경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경제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경제는 사람이 필요해서 만드는 삶의 한 양식중의 하나일 뿐이다. 국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국민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 국민의 절반 이상이 누구인가! 흔히 말하는 서민이다.

다시 말해 그 서민은 다시 노동자, 농민, 빈민이다. 우리인 것이다. 시장에 맡기자는 것은 결국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경제이다. 그러나 경제는 정치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다. 정치는 다분히 정치적이라 교묘하게 정치실체를 포장하지만 경제의 실체에서는 폭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대중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흔히 말은 하지만 그 대중적인 것의 구체성과 실체성은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구체성과 실체성이 폭로되는 경제부분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프로그램이 더더욱 필요할 때이다. 답은 하나이다. 때려치우고 시작해야 한다. 시장 제일주의에 빠져버린 이명박 정부를 향해 또다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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