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새해를 맞이하며

  • 입력 2016.01.03 21:15
  • 수정 2016.01.03 21:23
  • 기자명 전용중 전국농민회총연맹 경기도연맹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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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용중 전농 경기도연맹 사무처장

밤 사이 눈이 내렸습니다. 

털어 보지도 못하고 썩어버린 쭉정이 콩 무더기도 잠시 눈으로 가려졌습니다. 썩어가는 콩 무더기를 볼 때 마다 마음이 무거웠는데 못 본 척 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한결 마음이 편안합니다. 

콩은 알도 차지 않고 말라 죽거나 시들어 버렸습니다. 참 징한 가뭄이었습니다. 동네 한 복판 밭에 심은 콩이라 그냥 세워놓기가 민망해서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놈들을 무더기 무더기 베어 놓았었습니다. 지나가는 어르신들마다 “왜 콩 안 털어?”하면 “가물어서 알도 없어요. 거름이나 해야지요” 콩만 썩는 게 아니라 내 가슴도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내린 눈에 잠시 죄스러움을 감추는 자신의 간사함에 신기해 하다가 새로 사서 한 번도 쓰지 않은 콩 탈곡기를 마주하고는 웃음까지 나왔습니다. 콩 농사로 애들 학비나 충당하려 했는데 트랙터 기름 값에 탈곡기 값까지 빚만 더 늘었습니다. 농사가 원래 그런 거라 새삼스럽지 않지만 허탈합니다. 

2016년 새해엔 좀 다를까요? 

아직도 들에 거둬 들이지 못한 것이 남아있음이 농사짓는 놈에게 큰 부끄러운 일임을 절감합니다. 그것의 원인이 하늘일이든 나의 게으름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지난 한 해 벌여만 놓고 거둬들이지 못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으로, 아버지로, 아들로, 마을에서는 새마을지도자로, 청년회 감사로, 농민회에서는 면지회 총무로, 도연맹 사무처장으로, 농협에서는 대의원협의회 간사로…. 

쉼 없이 달려온 지난 한해였습니다. 그래도 나의 일 년 세상농사는 서글픈 들판만큼이나 빈약하지 않은가 뒤돌아보게 됩니다. 

희망으로 심는 재미만 알고 보람으로 거두는 기쁨을 모르는 욕심만 많은 게으름뱅이처럼 벌여놓기만 한 일에 한숨만 짓다가 새벽에 온 눈처럼 잠시라도 덮여지기를 소망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털지 못한 콩 대공은 봄이 오면 밭에 거름이라도 되지만 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거름이 될 리 만무합니다. 사람들과 하는 사업이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불신과 패배감만 남을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봄이 와도 심는 재미가 생기지 못 할 것입니다. 

눈 쌓인 콩밭을 보다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는 습관처럼 동학농민의 노래를 중얼거립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 

새해에는 좀 더 부지런을 떨어야 겠습니다. 농사도 사람과의 일도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이제라도 갈무리하여 신뢰와 자신감으로 새해를 만들어 가도록 해야 겠습니다. 

올해 나의 세상농사는 작년보다 더 잘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눈 덮인 새벽들판에 첫발자국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새해 농사가 여전히 밝지 못합니다. 그래도 미적거릴 수 없습니다. 농사를 하늘에만 의지한다면 그건 농사가 아닐 것입니다. 세상사도 그렇습니다. 어려울수록 미적거리지 말고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내가 먼저 서둘러서 올해는 작은 결실이라도 맺도록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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