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계란을 주고 「백로지」를 샀다

  • 입력 2016.01.03 10:36
  • 수정 2016.01.03 10:37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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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닭아, 닭아, 우지마라
…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인당수로 팔려가던 날 새벽의 심청의 초조한 심경을 노래한 대목이다. 농촌 사람들은 시계 없이도 불편 없이 잘 살았다. 도회지와는 달리 농촌에서의 삶 자체가 분초를 다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을 알리는 시계는 닭장에 있었다. 닭은 대개 세 번쯤 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첫닭이 우는’ 시각은 꼭두새벽이었으니 아마 4시쯤이 아녔을까? 그런 다음 일정 간격을 두고 두어 차례 더 울어야 날이 샜다. 엄니는 보통 두 번째 닭이 울고 나서야 아침을 지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아침을 알리는 시보가 닭 우는 소리라면, 정오는 동네 앰프에서 알려 주었다. 들일을 하다가 11시 55분에 시그널 음악이 울려나오면 사람들은 “김삿갓 방랑기 나오네. 점심 묵고 하세”하며 일손을 놓았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던 시절이라, 마을 이장은 때맞춰 앰프를 켜지 않으면 혼날 각오를 해야 했다.

오후 일과 중, 논밭에서 가장 먼저 퇴근하는 사람은 엄니였다. ‘해시계’를 보고서였다. 일을 하다가 서녘하늘을 힐끗 쳐다본 아부지가, “해가 한 뼘 이 안 남었네, 얼릉 가서 밥 하소”, 그러면 엄니는 호미를 털고 일어섰다. 처음에는 통 가늠이 되지 않았는데 자꾸 듣다 보니, 해가 서산마루로부터 얼 만큼 남았을 때 어른들이 ‘한 뼘’이라고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였는데, 암탉이 들으면 몹시 서운해 할 소리다. 수탉이 잘 못 울어서 수난을 당하는 경우는 나도 보았다. 우리 집에서 기르던 수탉 중에서 잔망스럽게도 어둠이 깃든 초저녁에 목청을 뽐내던 놈이 하나 있었다. 마침 집에 왔던 삼촌이, 수탉이 저녁에 울면 재수가 없으니 잡아먹어야 한다면서, 즉시 붙잡아 목을 비틀었던 것이다.

암탉은 대개 하루에 한 번은 제법 시끄럽게 운다. 알을 낳았을 때이다. 물론 새벽녘의 수탉처럼 화려한 날갯짓을 하며 하늘을 향해 근사하게 뽑아내는 울음은 아니지만, ‘꼬꼬댁, 꼬꼬꼬…’하는 울음을 꽤 요란하게 한참이나 운다. 생명의 원천인 알을 생산했으니, 그 위대한 역사(役事)는 널리 자랑하여 마땅하다. 거기서 꼭 병아리만 나오란 법이 있나. 주몽이 나올지 혁거세가 나올지 누가 아는가?

“엄니, 공책 사게 돈…”

아침에 그렇게 손을 벌렸을 때 엄니는 돈을 쥐어주는 때보다 계란을 주는 때가 더 잦았다. 살 물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한 꾸러미를 주기도 했고 달랑 두 개만 주기도 했다. 당시 학교 부근의 구멍가게에서 계란은 현금처럼 통하는 물품화폐였다.

“비싼 공책 살라 말고, 백로지를 사다가 잡기장으로 매서 쓰제.”

국어, 산수, 사회…하는 식으로 제목이 박혀 나온 공책은 비싸니까, 갱지 전지를 사다가 잘라서 공책을 매어 쓰라는 것이다. 이름은 근사하게 ‘백로(白露)’였지만 질이 좋지 않아서, 한 쪽 면에 필기를 하고나서 넘기면 뒷면은 울퉁불퉁 배겨 나와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게 ‘맨’ 공책에다 셈도 하고, 지도도 그리고, 동시도 썼다. 구멍가게에 가서 계란을 주고 학용품을 살 때, 몰래 하나 더 챙겨간 계란으로 바꿔먹은 눈깔사탕은 또 얼마나 맛났다고!

암탉이 울어야 공책도 나오고, 백로지도 나오고, 달디 단 사탕도 나왔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에서 여러 마리의 암탉이 더 자주 울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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