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살충제③] 인천에 농약공장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 살충제③] 인천에 농약공장이 있었다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5.12.2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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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던 DDT는 워낙 귀했기 때문에 농작물의 해충 방제에까지는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 하였다. 그런데 60년대 후반의 어느 시기부터는 웬 일인지 백색 분말의 살충제가 넉넉하게 공급되어서 농촌 들판에 아낌없이 살포되었다. 그 가루약은 고맙게도 나와 동생에게도, 이른 아침에 채소밭에 나가 젓가락으로 벌레를 잡아야 하는 수고를 단박에 면케 해주었다. 우리는 그 살충제 역시 DDT인 줄만 알았고 또한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비슷한 성분이긴 했지만 그것은 DDT가 아니라 벤젠 헥사클로라이드(benzene hexachloride)라는, 머리글자를 따서 BHC라고 표기된 분말 살충제였다. 대부분 영어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던 당시의 농부들에게 ‘비 에이치 씨이’…어쩌고 하는 글자는 발음하기가 영 거추장스러웠으므로, 혀끝에 똑 떨어지기도 하고 이전부터 써와서 익숙하기도 한 ‘디디티’라고 불러버렸던 것이다.

이 분말 살충제가 세상에 나오게 된 내력은 그 분야에 종사했던 전문가의 증언으로 들어야 옳다. 나는 2000년대 초에 <이제는 그리운 사람들>이라는 라디오(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3년여 동안 집필한 적이 있는데 그때 취재했던 사람들 중에 농약제조업체인 ‘동부한농화학’의 양준일 상무(당시)가 있었다.

“일제가 인천의 학익동에다 ‘조선농약(주)’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동수화제와 호리돌 등의 농약을 만들어 공급했지요. 해방이 되자 한국인이 그것을 적산(敵産)으로 물려받아 회사 이름을 ‘한국농약(주)’으로 바꾸고서 호리돌 등을 계속 만들었지만 생산량은 미미했습니다. 1965년도에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된 이후,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로 새롭게 시설을 갖추고 일본인 기술자를 데려다 생산을 시작했던 제품이 바로 BHC였습니다. 소금을 전기분해 시키면 염소가스가 나옵니다. 그 염소가스를 벤젠에다 흡수시켜서 농약을 만드는 공정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양잿물은 따로 비누공장에 갖다 팔고…”

양준일씨는 1972년도에 입사하여 인천공장의 작업 관리자로 근무했다는데 그가 들려주는 당시의 작업환경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겨울철이면 문을 모두 닫은 상태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남녀 노동자들은 부연 농약가루를 온종일 지천으로 마셔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면 공장 정문 앞은 일을 하겠다고 몰려오는 처녀 총각으로 북적거렸다.

다음에 이어질 얘기는 취재 당시에 양준일씨가 입 밖으로 꺼내기를 주저주저하였고, 나 역시 활자로 옮기기가 망설여지지만, 그 무렵 서민들의 ‘민생고’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사례여서 소개하기로 한다.

“하루 종일 농약가루를 마시면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특히 기관지가 좋지 않은 사람은 감당하기가 힘들었지요. 하지만 노동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농약의 독성으로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못 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가도 지정병원에 가기를 거부하고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우깁니다. 한 번은 우리 공장 여성노동자의 남편이, 부인이 병이 났으니 치료를 해달라고 찾아왔는데,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말을 잘 못 하고 망설이는 겁니다. 작업환경이 워낙 열악하니까 아침마다 새 마스크 하나씩을 지급했어요. 그러면 전에 쓰던 마스크는 버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여성노동자는 농약 투성이의 그 마스크를 아까워서 버리지 못 하고 생리대로 대신 사용하였다가…”

아, 우리의 누이들은 그렇게 살았다. 지금은 모두 할머니가 되었겠지만.

결국 BHC 역시 DDT 못지않게 유해하다 하여 1978년 무렵에 공장이 강제 폐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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