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49회

  • 입력 2015.12.26 11:19
  • 수정 2015.12.26 11:25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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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계산대로 일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서류상으로만 꾸미려던 것이 일단 보리씨를 뿌렸다가 나중에 갈아엎는 걸로 했다. 아예 보리를 심지도 않았다가 들키면 공무원들 목이 달아난다며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리를 심은 것까지 공무원에게 확인을 받고 나중에 농민이 자의적으로 갈아엎은 다음 마늘을 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무려면 돈 좀 해보려고 심었다는데 농민을 잡아가두기야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농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보리 종자 값이며 갈아엎는 비용이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햇보리를 구하려 하자 수매가 오천 원에 아무리 싸게 주어도 천오백 원은 얹어 주어야 살 수가 있었다. 이래저래 손해가 많았지만 역시 마늘 값이 좋아서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그래도 정부가 강제로 보리를 심으라고 하는 바람에 농민들이 많은 손해를 본 것만은 틀림없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1978년 여름이었다. 전부터 오가며 인사를 나누고 두어 번 식사 자리에서 만났던 국회의원 박종렬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이미 지역에서 3선을 한 관록 있는 국회의원이었다. 대통령과 군대 생활을 같이 했다는 그는 모나지 않은 성격으로 지역에서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나오면 당선이라 ‘박종렬이 선거 하나마나’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떠돌 정도였다.

“정동지, 시골에서 음풍농월만 하지 말고 이제 큰일을 좀 해야지?”

작은 체구에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기름 발라서 넘긴 그의 모습이 어딘지 대통령을 닮았다고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술잔을 받았다. 하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비서 둘만 대동하고 읍내 요정에서 단 둘이 만난 것만도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무슨 큰일을 할 인물이 되나요? 그저 새마을운동을 신념으로 나라에 이바지하는 보람으로 사는 것입죠.”

“무슨 소리를. 우리 선거구에 정동지만 한 인물이 어디 있나? 내 진즉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다고.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얼마나 더 의원 생활을 하겠나.”

점점 아리송한 말이었다.

“의원님이야 아직 한창이시지요. 앞으로 삼선은 더 하셔야지요.”

“아니야. 아니야. 지역에서 참신한 사람이 나오면 넘겨주어야지.”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비서관이 조금 눈치를 보듯이 박종렬의 기색을 살피더니 낮게 입을 열었다.

“의원님이 이번 선거 후에 아마 장관으로 가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지역구를 잘 정리해놓으시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이 떠돌기는 했다. 농림부 장관으로 간다고도 했고 내무부 쪽이라고도 했지만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설왕설래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었다. 딱히 선택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과장되게 인사를 차렸다.

“아, 그러시구만요. 의원님이야 대통령 각하 곁에서 큰일을 하셔야지요. 축하드리겠습니다.”

선택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공손하게 술잔을 따랐다.

“아니야.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고. 우선 이번 선거를 잘 치러야지. 그래서 말인데 정동지가 이번에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어.”

혹시 돈 이야기인가 싶은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 그는 읍내에 있던 낡은 고향집을 고쳐서 살고 있었는데 실제로 청렴결백해서 그렇다고도 했고 뒤에 돈을 쌓아두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쇼를 한다고도 했다. 돈으로 도와달라면 얼마간 도와주는 거야 별 일이 아니었다.

“정동지가 우리 지구당 부위원장을 좀 맡아주어야겠어.”

“제가 부위원장을요?”

깜짝 놀랄 만 한 제안이었다. 국회의원이 지구당 위원장이므로 부위원장이라면 바로 2인자가 아닌가 말이다. 잠시 선택은 제가 들은 말이 정말인가 싶었다.

“뭘 그리 놀라나? 정동지 정도면 당연히 그런 자리를 맡을 만하지.”

박종렬은 정색을 하고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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