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살충제②] 젓가락으로 배추벌레를 잡다

  • 입력 2015.12.18 15:5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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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금년 배추 농사 잘 지었네 그려.”

1960년대, 가을철에 뉘 집 남새밭을 쓰윽 한 번 둘러본 방문객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 집 식구들의 근면성은 일단 알아주어야 한다. 배추농사의 성패는 무엇보다 ‘청벌레’라고 불리는 배추벌레의 공격을 얼마나 잘 막아냈느냐에 달려 있었다. 여간 부지런한 집이 아니라면, 가을 김장철에 남새밭에서, 깨끗하고 멀쩡한 배추를 수확할 기대는 아예 그만두어야 했다. 배추가 한창 자라는 여름철에 그 청벌레를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면, 흡사 얼개미처럼 구멍천지가 돼 있기 일쑤였던 것이다.

“싸게 안 일어나냐? 벌거지가 다 갉어묵어불면, 놈 부끄러서 어짜까이.”

엄니의 잔소리가 그쯤 길어지면, 달콤한 아침잠의 끄나풀을 눈두덩에 매단 채로 휘청휘청 마당으로 나선다. 그 청벌레란 놈은 해가 뜨면 종적을 감추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잡아주어야 했다. 엄니는 가을철에 온전하고 실한 김장거리를 확보하는 것 이상으로, 벌레구멍투성이의 ‘놈 부끄러운’ 꼴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듯했다.

동생과 나는 싸리나무 가지를 분질러 젓가락을 만든 다음, 깡통 하나씩을 챙겨 들고 남새밭으로 출동하였다. 철저히 보호색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녀석들을 잡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배추밭은 우리 형제가, 밥상머리에서 아부지한테 배운 젓가락질을 숙달하는 학습장이기도 했다.

우리의 벌레잡기 작업이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는 놈들은 따로 있었다. 우리가 깡통을 기울여 배추벌레들을 바닥에 쏟아놓는 순간, 닭장 속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달구새끼들’한테는 배추벌레가 별식으로 차린 맛난 조찬이었을지 모르나, 단잠을 잘라먹고 아침 노역에 징발된 나에게는 귀찮기 짝이 없는 버러지들이었다. 우리의 박멸대상은 배추벌레만이 아니었다. 참깨 밭에도 콩밭에도 고구마 밭에도 벌레들 천지였다. 특히 고구마 밭의 벌레는 어른 가운뎃손가락보다 더 크고 굵어서 자칫 발에 밟히기라도 하면, 터져 으깨어진 푸르뎅뎅한 잔해의 모습이 으스스 몸서리를 떨게 하였다.

벌레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은 비단 농작물뿐이 아니었다. 재산목록 1호인 소 역시 해충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를 괴롭히는 해충은 진드기였는데, 피를 잔뜩 빨아먹어서 몸이 불어있을 때의 진드기는, 그 크기가 잘 익은 피마자 열매만큼이나 했다. 소를 정성껏 잘 관리하는 주인을 만나면 가랑이 사이가 비교적 깨끗했지만 그 반대인 경우 사방에 진드기가 들러붙어서 그 몰골이 매우 흉하였다. 우리 엄니가 무척 싫어했던 ‘놈 부끄런’ 경우였다.

우리가 소를 먹이러 집을 나설 때면, 낫이나 망태와 함께 꼭 챙기는 물건이 있었다. 진드기를 떼는 기구였다. 기구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나무주걱 자루만한 막대의 끝에다 양철조각을 구부려 붙인,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소의 효자손’쯤 되는 물건이었다.

“우리 여그서 진드기 조깐 잡고 가자!”

마을을 벗어나 뒷재를 막 넘으면 이르게 되는 참나무 밑 평지는, 우리가 소의 진드기를 퇴치하는 고정 장소였다. 진드기란 놈들은 가랑이 사이 뿐 아니라 아랫배며, 정강이며, 목덜미며, 심지어는 양쪽 귓바퀴에까지 들러붙어서 피를 빨아먹었다. 우리는 그 양철주걱으로 구석구석에 붙어있는 진드기를 떼어냈다. 큰놈들이야 쉽게 눈에 뜨여서 떼어내기가 쉬웠으나, 털 속을 파고들어가 납작 붙어 있는 새끼 진드기들은 어지간해서는 떨어지지 않아 애를 먹였다.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바닥에 떨어진 진드기들을 쓸어 모은 다음, 그 위에다 모닥불을 피워 소각하였다. 그런데, 소 진드기를 잡기 위해서 양철주걱으로 몸뚱어리 여기저기를 긁어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있었다. DDT 배급을 타온 날이었다. 아부지는 양철대야에 물을 붓고 DDT 가루를 탄 다음, 그것을 물걸레에 적셔서는 잔등이며 사타구니며 앞다리 사이 등에 문질러 발랐다. 그렇게 한 번 방제를 하고나면 며칠 동안은 양철주걱을 들고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 날 아부지를 따라서 들에 나갔다가, 색다른 병충해 방제작업을 해본 적이 있었다. 작은 병에 담긴 석유기름을 막대기로 찍어서는, 농작물의 벌레 먹은 부분에다 일일이 바르는 매우원시적인 방식이었다. 농약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에는 해충들과 그렇게들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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