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농사, 달리 말하고 달리 듣기

  • 입력 2015.12.18 15:50
  • 기자명 구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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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점숙(경남 남해군 삼동면)
부녀회 모임을 한다거나 제사음식을 나눠 먹을 때나, 심지어는 마을관광을 가더라도 농민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농사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대개는 현재 짓고 있는 농사에 대한 이야기지만 또 지나간 농사에 대한 갈무리도 합니다. 올해 고추를 몇 근 땄다, 나락이 그 논에서 몇 가마니가 나왔다는 얘기며 그래서 총 얼마 벌었다는 얘기를 자랑삼아 하는데 번번이 나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우리 집과 비슷한 수준의 농사를 짓는데도 나락이며 고추, 마늘 소득이 우리 집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얼치기 농사꾼이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암만요, 오로지 농사에만 집중하는 농민들의 우직한 농법을 따라가기는 언제나 어려운 법이지요. 그럴 때마다 남편과 얘기를 나누며 농사를 더 열심히 지어서 남들만큼 소득을 올려보자고 작은 목표를 세워보곤 합니다.

그런데 웬걸, 우리도 농사를 열심히 짓고 그래서 제법 모양이 나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소득에는 언제나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한참 후에나 알았습니다. 그것은 농민들의 자존심이었다는 것을. 엄청나게 부풀려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끝자리 수 정도는 반올림한다는 것이고 한 번 잘 지은 농사를 매번 그 수준으로 말한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기 싫은 까닭이고 농민으로서 농사를 잘 짓는 것만큼의 자랑은 없는 것이기에 농사를 말할 때는 언제나 부풀려서 말하게 된답니다. 결과를 공유함에 있어서 솔직하게 자신의 농사를 말하지 않는 풍토가 있다는 것인데 어찌보면 서로에게 허용적이지 않는 문화가 작용하는 듯 싶습니다. 농사를 못 짓는다는 것은 능력의 부족으로, 수준미달로 평가받기 쉽기 때문에 허세를 피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요즘 어지간한 농사가 죄다 생산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농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또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농사짓기가 전에 없이 까다롭고 없던 병해충이 생겨나서는 생각만큼 농사를 짓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새로 나온 온갖 농약을 치고, 외국에서 직수입된 비싼 비료를 뿌립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농사를 잘 지으려고, 여기서 이 정도의 생산량은 있어야 한다고 잠시도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습니다. 빈 땅을 못 놀리는 농민의 성정으로 말미암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면서도 내년에는 좀 나아질 것이라 기대를 하며 농사를 짓지만 역시나 호주머니는 불러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농민들의 얘기로만 치자면 농사가 그런대로 괜찮은 모양새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한 사람이 농사 못 짓겠다고, 이렇게나 돈이 안 될 수는 없다고 강하게 불만을 표하면 그때서야 너도 나도 실은 농사가 돈이 안 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농협에 출하했던 나락값이 4만4천원으로 결정되었다는 얘기에 농민들이 어안이 벙벙해합니다. 4만2천원으로 선지급금을 줄 때는 그래도 좀 더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에누리 없이 2천원만 더 준다 하니 긴가민가해 합니다. 나락값이 떨어져도 이렇게나 떨어질 수 없다고, 참말이지 누가 농사지어 살겠냐고 야단을 하는데 거기까지입니다. 세상따라 사는 익숙함이라니. 할 말 할 줄 아는 기골있는 어른들도 이제는 연로하셔서는 헛 웃음만 껄껄 날리십니다.

또 모를 일이지요. 나는 농협에 출하한 쌀보다 더 비싸게 시중에 팔았다고, 내 쌀은 미질이 좋아서 잘 사간다고, 나락값이 없어도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고, 농사도 내 하기 나름이라고, 그래서 살만한 세상이라고 누군가는 허세를 부릴지도. 그러나 농민들은 들을 때는 똑바로 듣겠지요. 농협에 출하한 쌀보다 더 싸게 팔수밖에 없었다고, 내 쌀이나 당신 쌀이나 뭐가 다를 것이며, 나락값이 없는데 무슨 재주로 살 수 있냐고, 농사는 내 하기 나름이 아니라 하늘이 돕고 나라님이 나서야한다고, 그래서 농민은 참말이지 못 살겠다고. 어쨌거나 농민들은 재주꾼입니다. 달리 말하고 달리 듣는 재주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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