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48회

  • 입력 2015.12.18 13:38
  • 수정 2015.12.18 13:45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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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서 농사짓는 풍속도 변해갔다. 전에는 조금씩 심어서 양념이나 하던 고추와 마늘을 심는 농가가 늘어갔다. 농민들이 어수룩해보여도 눈치가 빠르고 돈 되는 곳에 몰려드는 것은 도시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특히 마늘 값이 좋고 지역의 토양과도 맞아서 가을에 나락을 베고 나서 논에 마늘을 심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곡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올해는 보리 말고 마늘을 심어 볼라네.”

농사를 도맡아 하는 삼촌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선택도 흔연히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보리에 비해 들어가는 밑천이 많고 일도 더 많지만 그런 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선뜻 마늘 농사를 시작하지 못하는 농가는 대개 씨 마늘 값이 부담되어서였다. 마늘은 농작물 중에 씨앗 대비해서 가장 소출이 안 나는 작물이다. 콩이나 깨는 수백, 수천 배로 열매를 맺지만 잘 되어야 다섯 배, 잘못 되면 두세 배로 그치는 게 마늘 농사였다. 그러니까 들어가는 밑천이 거의 없는 보리농사로 이모작을 하던 논을 마늘로 바꾸기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늘로 목돈을 쥐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점점 보리를 심는 논은 사라지고 있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지도자님, 정부에서 지금 보통 닦달을 하는 게 아녀요. 올해 보리 경지면적을 조사해서 올리라고 하는데 우리 면내에 면적이 너무 줄어서 공무원들 모가지 떨어지게 생겼어요.”

시곡 마을을 담당하는 면서기가 선택을 찾아와 하는 하소연을 듣고서야 선택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정부 정책은 여전히 식량증산이 제일의 목표였다. 그런 판에 식량인 보리가 나와야 할 논에 마늘을 심으면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공무원들은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정부가 하는 일에 따라야 하는 공무원이지만 농민들이 제 논에 돈 되는 마늘을 심겠다는 걸 말릴 수도, 말릴 법적인 근거도 없었다.

“당장 면적을 계산해서 올려야 하는데 이를 어째야 할지 죽을 지경입니다. 마음마다 논 면적이 다 나와 있으니까 그 중에 팔십 프로 이상은 보리를 심어야 한다는 거예요.”

팔십 프로는커녕 삼십 프로도 안 되는 실정이었다. 그 때 언뜻 선택의 머리를 스쳐가는 묘수가 있었다. 오랜 동안 농협에 근무하며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 행정이란 게 대개 탁상에서 시작해서 탁상에서 끝난다는 거였다. 서류만 제대로 갖추면 못할 일이 없었다.

“일단 면적을 계산해서 서류를 올리게. 보리를 심는다고 해서 올리고 나중에 마늘을 심더라도 그걸 누가 사후에 조사하지는 않을 게야.”

“에고, 지도자님도. 누가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습니까? 그런데 하곡 수매 때 심은 만큼 보리가 나와야 하는데 정작 보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죠.” 선택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한창 젊은 면서기가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싶었다.

“이 사람아, 누가 그걸 모르나. 일단 농민들한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나중에 보리 수매 때 보리를 구해다가 수매를 하면 되지. 저 아랫녘에 보리가 많이 나는 데 가서 고놈을 사다가 수매를 하면 누가 알 것이여? 충청도 보리, 전라도 보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께. 농민들이 손해 보는 건 사오는 값하고 수매가 차이니까 몇 푼 안 된다, 이거여. 그 차이만큼은 논에 보리 대신 마늘을 심은 농가가 부담을 하면 된다, 이 말이지. 그렇게 해도 마늘이 훨씬 나으니까 다들 찬성할 것이여.”

선택의 말을 들은 면서기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런 수가 있었구만요. 농민들한테는 강제로 보리를 심어야 하는데, 면에서 이렇게 봐주는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하고.”

그런 쪽으로는 금세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말이 나면 안 되니까, 정 면적이 모자라는 마을 위주로 소리 소문 없이 그렇게 해보자고.”

그 해에 그렇게 해서 논에 마늘을 심은 농가는 보리 한 가마에 수매가보다 이천 원씩을 더 얹어 사와서 울며 겨자 먹기로 보리수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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