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살충제①] 「디디티(DDT)」를 아십니까

  • 입력 2015.12.13 00:47
  • 수정 2015.12.13 00:4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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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1970년대 중반, 예비사단의 신병교육대에서 6주간의 훈련을 씩씩하게 마치고 강원도의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다. 때는 겨우 추석을 막 지날 무렵이었는데도 벌써 으스스한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고참병들은, 머잖아 본격 겨울철로 접어들면 수은주가 영하 20도쯤은 우습게 오르내린다며, 그렇잖아도 낯선 환경에 주눅 들어 있던 신병들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그런데, 내가 중대 내무반에 더블 백을 내려놓자마자 가장 먼저 수행했던 임무는 총검술도 사격술 훈련도 뭣도 아닌 바느질이었다. 선임하사가 중대원들에게 말했다.

“오늘 일석점호 때 동절기 방충 준비태세 점검이 있을 테니까 지적받는 일 없도록 할 것!”

‘방충 준비태세’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군사작전을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 쉬운 말로 겨울철에 착용할 내복에다 ‘이약 주머니’를 만들어 다는 일이었다.

우리는 명함 크기의 헝겊을 접어서 가래떡 굵기의 주머니를 만든 다음, 그 속에다 하얀 가루약을 채워 넣어서 이약주머니를 제작하였다. 드디어 저녁 점호 시간에 내복 차림으로 검열을 받았다. 양쪽 겨드랑이에 하나씩, 그리고 가랑이 사이에 하나를 달았다. 맞은편 침상의 병사들이 가랑이 사이마다 이약주머니를 달랑거리고 늘어서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금방이라도 웃음보가 터질 지경이었으나 허벅지를 꼬집어 간신히 참았다. 그 이약 주머니 속의 백색 분말이 바로 DDT였다. 사실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이미 DDT에 대한 유해성이 널리 알려져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농약으로 사용하는 것도 금하였으나, 우리 같은 ‘후진국’에서는 그때까지도 DDT는 그저 만병통치, 아니 ‘만충통치(萬蟲通治)’의 묘약으로 통했다.

60년대 초반 무렵에는 DDT가 워낙 귀했기 때문에 들판에 농약으로 뿌릴 엄두를 내지는 못 하였다. 대신에 이나 벼룩이나 빈대 등을 박멸하는 집안에서의 살충제로 각광을 받았다. 마을회관에서 DDT 배급을 받아온 날은 온 식구가 가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었다.

“옷 벗어 봐!”

아부지는 나와 동생의 옷을 홀랑 벗기고는 문제의 그 분말을, 마치 요즘 갓난아이의 몸에다 파우더를 바르듯이, 등짝이며 사타구니며 가릴 것 없이 맨살에다 마구 발랐다. 그런 다음 겉옷 속옷 가릴 것 없이, 국수 도마에 밀가루 뿌리듯 막 뿌렸다.

“요놈 갖고 가서 방에도 조깐 쳐라!”

나는 가루약 봉지를 받아들고 방에 들어가서는 장판을 들추고서 사방을 둘러가며 DDT 분말을 신나게 뿌려댔다. ‘이’라는 놈은 차라리 눈에 띄기는 하니까 옷을 벗어서 잡을 수가 있었으나, 빈대나 벼룩은 잘 보이지도 않은데다 오살 맞게 가렵기만 해서 영 골칫거리였다. 약을 뿌리고 나면 얼마 동안은 잠자리가 편했다. 사실 밤새 뒹굴고 뒤채면서, 좁은 방구석 여기저기 뿌려댄 그 백색 분말을 지천으로 마셔댔으니, 차라리 이나 벼룩에 시달리는 편이 몸에 덜 해로울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DDT의 유해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 하였다.

그 무렵 나는 학교에서 아랫마을의 한 여자아이만 보면 이상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몹쓸 병을 앓고 있었다. 그 애는 얼굴이 넓적하고(그때 나는 넓은 얼굴을 가진 여자를 미인이라 생각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런데 학기가 바뀌면서 그 가시나가 하필이면 내 바로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가슴 두근거리는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자연시간에 필기를 하고 있었는데, 무지하게 크고 통통한 이 한 마리가 그 애의 등짝을 타고 기어 올라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옆자리의 재석이가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책받침을 들어 살며시 녀석을 책상으로 떨어뜨린 다음, 양철필통으로 짓이겨서 가차 없이 압살하였다. 끝 종이 울려서 변소에 갈 요량으로 일어섰다가, 이번에는 그 여자애의 정수리 쪽을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꽤 여러 가닥의 머리카락에 일정 간격으로 서캐(이의 알)가 줄줄이 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이른 봄에 버들강아지에 주렁주렁 망울이 달려 있는 그런 모양새였다. 그 때 나도 대부분의 사내 녀석들처럼 까까머리에 기계 충을 얹고 다니는 꾀죄죄한 처지였으나, 정인(情人?)의 그 별 것 아닌 흠결을 너그러이 보아줄 만한, 넉넉한 가슴을 지니지는 못 하였다. 가슴 뛰는 증세가 단박에 나아버렸다. 그 아이 잘못이 아니었다. 머리에 DDT를 뿌려주지 않았던 그 부모님의 잘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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