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선진지 견학을 준비하는 총무 아내의 속마음
[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선진지 견학을 준비하는 총무 아내의 속마음
  • 구점숙
  • 승인 2015.12.0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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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점숙(경남 남해군 삼동면)
비오는 날과 비오는 날 사이의, 모처럼 맑고 화창한 날에 면 마늘 작목회 선진지 견학을 다녀왔습니다. 이 작목회 회원은 주로 남성농민들로 이뤄져있고, 군내 전 읍면단위에 기반하고 있는 규모있는 작목회이니 만큼 생산이나 출하 등의 공동작업보다는 마늘작목에 대한 정책을 제시하는 역할과 회원 상호 간의 인화단결 활동 중심입니다. 해마다 마늘농사가 마무리 되는 이맘쯤의 늦가을에 회원부부 동반으로 참여하는 친목 도모 겸 선진지 견학은 한 해 활동의 꽃입니다. 하다 보니 작목회 총무의 아내인 나로서는 신경이 곤두서게 됩니다. 40~50명이 틈틈이 먹을 간식거리를 준비할 생각에 지레 걱정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크고 뚜렷하면서도 규모가 작은 모임은 소소한 실수에 대해서 관대하지만, 빠지면 안 될 것 같은 성격을 가지는 큰 규모의 작목회는 형식과 절차를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실무준비를 촘촘히 챙겨야 합니다. 한평생 농사일과 지역일로 잔뼈가 굵은 어르신 연배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는 시어른을 몇 십 분이나 모시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이 작목회의 나들이 음식 준비를 벌써 세 번째로 맞이하는 만큼 이제는 별 어려움 없이 능수능란하게 할 때도 되었는데 막상 때가 되면 예민해집니다. 음식이 너무 많이 남으면 재정운용에 요령이 없다고 지탄받을 까봐, 반대로 너무 부족하면 성의 없다고 비춰질까봐 하는 등 음식준비에 조바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 고민은 남편의 고민입니다. 먼발치에서 보면 부부니까 응당 그럴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남편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 되는 데는 먼저 남편의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여러 모임의 중요한 장을 맡아서 일을 해보았지만 그때 남편의 손이 필요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합니다. 집안일과 겹치지 않도록 일정을 조정하는 일 외에 실제 모임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남편의 손을 빌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내 못하는 일을 남편을 믿고 추진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이는 아무래도 남편의 성정이 크게 작용을 하는 탓일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또 주위 어른들의 삶속에서 배웠겠지요.) 남편은 음식준비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음식준비나 나들이 준비를 여성의 역할로만 바라보았던 것이겠지요. 따지고 보면 실제 대부분의 음식은 주문하는 것이고 직접 집에서 손으로 하는 것은 별로 없는데도 남편은 아내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랍니다. 허나 헌신성은 자발적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만 강요된 헌신성은 딴 마음을 키웁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예외는 없겠지요.

아, 참고로 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을 귀찮게 여긴다거나 허드렛일을 멀리하는 유형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정히 사람을 챙겨주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지요. 문제의 핵심은 남편의 사회활동을 가정 내에서 돕는 정도를 넘어, 아내가 밖에서도 이름 없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데 대한 문제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역의 수많은 기관단체 모임이나, 작목회, 계모임 등 사람이 모이는 모든 모임에서 먹거리를 뒷받침 해온 이들이 바로 아내라는 이름의 여성입니다. 헌신적인 아내의 뒷받침은 남편의 지위를 높여주고, 지위가 높아진 남편은 그런 아내를 하찮은 일을 하는 당연한 조력자로만 여기는 것이 흔한 일상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문화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이 모든 것을 남편의 능력쯤으로 인식하지, 야무진 여성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그 능력을 비춰주지 않으니까요.

정말로 아내의 손이 필요하면 당연시 하지 마시라, 귀하게 여기시라, 그러고는 그 고마움 이상의 마음을 전하시라, 그러면 관계가 깊어지리니. 부부관계가 원래 깊은 것인데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냐고요? 천만의 말씀! 사람과 사람사이의 깊이는 더할수록 외로움이 작아집니다. 세상에 대한 불안감도 작아집니다. 반대로 부부사이의 당연함은 멀리, 더 멀리 출장을 보낼수록 행복감은 배가됩니다.

그나저나 연세 지긋한 어르신의 말씀이 귓전에 맴돕니다. ‘늙은 우리가 선진지 견학에서 배운 것은 저승에서나 써먹어 보세.’ 서투른 준비에도 함께해주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이제껏 농사짓느라 애쓰셨던 그 마음 높이, 또 높이 삽니다. 내년에 또 가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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