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한길 걸어온 ‘상록수’ 같은 농민

농민 백남기씨의 지난 삶, 안타까움 더해 … 막내 딸 편지에 시민들 눈물

  • 입력 2015.11.23 09:55
  • 수정 2015.11.23 10:51
  • 기자명 박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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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

▲ 19일 현재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가 꽹과리를 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농민생존권을 요구하며 지난 14일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했던 농민 백남기(69)씨.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그는 지금 서울대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연일 백씨의 쾌유를 기원하는 가운데 그의 지난 삶이 알려지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백씨는 1947년 8월 전남 보성군 웅치면 출생으로 광주서중, 광주고를 졸업하고 1968년 3월 중앙대에 입학했다. 박정희 정권이 위수령을 발동하며 1971년 군홧발이 교내에 진입하자 이를 막기 위한 시위를 했고 1차 제적을 당했다. 이후 1973년엔 교내에서 유신철폐 시위를 주도했고 수배로 명동성당에 피신을 가기도 했다. 1975년엔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2차 제적을 당했다.

이후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하다가 1980년 복교해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총학생회를 재건해 1기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해 5월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을 주도했고, 민주화의 염원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서울의 봄 당시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를 주도했다. 그러나 곧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퇴학을 당했다.

1981년엔 고향인 보성으로 귀향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부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을 주도하며 공동의장을 맡기도했다. 백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공자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끝까지 보상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슬하엔 1남2녀를 뒀고 백도라지, 백두산, 백민주화라는 자녀들의 이름이 그의 삶과 맞닿아 있어 회자되고 있다.

박형대 전농 정책위원장은 “민주화를 위해 한길을 걸어오신 상록수 같은 분”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김정섭 보성군농민회 사무국장은 “항상 당당하고 올곧았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웠다. 사회의 모범을 보여주는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분”이라고 기억했다.

한편,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막내딸인 백민주화(29)씨가 급거 귀국하며 SNS를 통해 백씨에게 남긴 편지는 많은 시민들의 눈물샘을 두드렸다. 민주화씨는 “나는 삼십 년간 진행중인 아빠 딸이니 내가 잘 알아. 아빠는 세상의 영웅이고픈 사람이 아니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지”라며 “근데 아빠, 왜 저렇게 다쳐서 차갑게 누워있어? 시민이자 농민으로서 해야할 일을 한 건데 왜 저렇게 차가운 바닥에 피까지 흘리며 누워있어? 뭘 잘못 한 건지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 누가 그랬어? 수많은 사진들 다 뚫고 들어가서 안아주고 싶고 피도 내 손으로 닦아주고 싶어 미치겠어”라고 남겼다. 민주화씨는 또한 “아빠 이제 진짜 영웅이 될 때야. 지오(손자)랑 장구치며 춤추고 잡기놀이 하던 우리 가족의 영웅. 눈 번쩍 떠서 다시 제자리로 꼭 돌아와줘. 꼭. 사랑하고 많이 보고싶어”라고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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