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불②] 초가집에 불이 났다!

  • 입력 2015.11.22 01:0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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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동네 소사(小使)이자 이장의 거추꾼이었던 춘실이 아버지는 목소리가 좋았다. 확성기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모든 공지사항이 그의 목소리를 타고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우리 동네는 60여 가호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집들이 비탈바지 둔덕의 이 쪽 저 쪽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춘실이 아버지는 같은 내용을 가지고 대여섯 곳을 옮아 다니며 외쳐야 했다. 그가 소리쳐 전파하는 공지사항들은 그 내용이 다양했다. “주민, 여러분! 시방, 쥐약을, 나눠주고 있응께, 즉시로, 동각으로 나와서, 쥐약들, 타가시오!”, “재식이, 즈그 아부지, 환갑잔치가 있응께, 모다들, 나와서, 술 한 잔씩, 하시오!”…그가 울대를 힘껏 돋워 토막토막 외치는 그것을 우리는 ‘욋소리’라고 했다. 우리 집 바로 윗집인 영길이네 돌담이 바로 춘실이 아버지가 올라가서 욋소리를 하는 고정 장소였다.

어느 가을날 해질 무렵, 춘실이 아버지의 다급한 욋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방, 벵식이 즈그 집에, 불이 났응께, 모다들 불끄러 나오시오!”

나는 그때 막 우물에 다녀온 엄니의 머리에서 양철 물통을 받아 내려주고 있었는데, 엄니는 욋소리를 듣자마자 내렸던 그것을 다시 이어 달라 하더니 서둘러 사립을 나섰다.

“뭣하고 있어! 너도 시숫대에다 물 퍼들고 따러와!”

나도 세숫대야에 물을 퍼 담아 들고 허둥지둥 엄니 뒤를 따라 나갔는데 몇 걸음 가지도 못 해서 꿀렁꿀렁, 반도 넘게 쏟아져 버렸다.

병식이네 집으로 향하는 고샅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여인네들은 물동이를 이고, 아이들은 바가지나 주전자를 들고, 남자들은 낫이나 사다리 따위를 갖고서 화재 현장으로 몰려갔다. 여인네들의 물동이는 남자 어른들의 손에 의하여 앞으로, 앞으로 전달되었고 불난 지붕에 끼얹고 난 뒤의 빈 물동이는 역시 사람들의 손을 타고서 거꾸로 전달되었다. 엄니는 벌써 두 번째 빈 양철통을 들고 우물로 내달았다. 병식이네 집과 우물을 잇는 동네 사람들의 긴 행렬이 부산스럽게 굼틀거렸다.

단짝 동무인 종석이와 나는 행렬의 중간에 끼여 있었는데 불구경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으므로, 어른들의 눈치를 요리조리 피해서 드디어 화재 현장까지 다다랐다. 매캐한 연기가 저녁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몇몇 어른들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위에 올라가서는 쉼 없이 전달돼 오는 물동이를 비워댔지만 불길은 쉬이 잡히지 않았다. 검은 연기 사이로 가끔씩 벌건 불길이 보이고 서까래 사이로 불덩이가 떨어져 내릴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에 따르면, 병식이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불길이 부엌에 쌓아둔 마른 솔가지에 옮아붙어 화재로 번진 것이었다.

병식이네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재평이네 집도 비상이 걸렸다. 불똥이 옆으로 튀는 날이면 큰일이었으므로 재평이 아버지는 덕석을 미리 지붕으로 올려서 덮고는 그 덕석에 연신 물을 뿌려 적시고 있었다.

“여그서는 잘 안 뵉이네. 야, 우리 저 쪽으로 가보자.”

종석이와 나는 어른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불타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동네 사람들의 합심협력으로 이제 불길이 거의 잡혀가고 있었다.

“인자 불이 꺼져분다, 이.”

종석이가 아쉽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얼결에 “그랑께 말여”라고 대꾸했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불이 난 집의 외동아들인 병식이는 같은 반 동무였다. 동무네 집에 불이 나서 집이 영 못 쓰게 될 지경인데, 그리고 그 집 불을 끄겠다고 엄니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고 있는 터에, 불길이 맥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다니!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서도, 내 가슴 속 어딘가에 불길이 더 활활 타오르기를 바랐던 악마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괴롭고도 막 이상했다. 나는 희미한 등잔불빛에 어른거리는 천장의 무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사람일까? 혹시 아닐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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