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44회

  • 입력 2015.11.20 13:06
  • 수정 2015.11.20 13:0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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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가 있던 그 해에 면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사업은 마을 구판장의 설치였다. 이미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마을마다 부녀회가 결성되어 있었고 부녀회의 사업은 크게 절미운동, 마을공동경작지 운영, 구판장 사업 등이었다. 절미운동은 별 게 아니었다. 밥을 지을 때마다 조금씩 쌀을 떼어서 항아리에 모았다가 돈으로 바꾸어 저축을 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혼식을 독려하여 한 끼에 들어가는 쌀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는 터에 한 숟가락씩 떼어봐야 병아리 오줌만큼이나 될 터인데도 부녀들의 호응은 높았다. 여자들로서는 평생 처음 정부 시책에 따라 당당하게 제 앞으로 쌈짓돈을 만드는 것이었으니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쌀을 팔아 오백 원이 모이면 그 돈을 밑천으로 농협에서 통장을 만들었고 아무리 가난한 시골이라도 마누라가 쌀을 아껴 만든 그 통장은 짐짓 모른 체하는 분위기였다. 정부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절미저축은 농촌 여성들에게 상당한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작으나마 스스로 재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다. 물론 그렇게 모은 돈도 다 가정 살림에 쓰이기는 했지만 경제의 주체라는 의미는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녀회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했는데 보통 한 달에 한 번 이상 모여서 마을 일을 논의하였다. 마을회의 역시 여성들이 마을 일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마치 예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가장 맹렬하게 믿었던 것이 사회적 억압에 놓여 있던 여성들이었던 것처럼 새마을운동은 농촌 여성들을 변화시키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물론 그 와중에 고루한 시부모와 부딪쳐서 집안에 분란이 일어나는 일도 잦았지만 새마을운동의 열기는 광포할 정도로 뜨거운 것이어서 젊은 부녀자들은 마치 홀린 듯이 열심히 부녀회 활동에 빠져들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시곡리에서도 부녀회원들은 오십여 명이 넘었다. 선택의 부인도 부녀회장을 여러 해 맡았고 마을 일에 열심이었다. 그 또래의 젊은 부녀회원들은 공동으로 누에를 치기도 하고 산을 개간하여 공동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여 기금을 만들었다. 마을회관 한 쪽에 구판장을 만들어 돌아가면서 운영을 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이 보통 쏠쏠한 게 아니었다. 빨래비누나 설탕, 성냥 같은 생활필수품을 한꺼번에 싸게 구입하여 판매하는 방식이었는데 나중에는 전매청에서 담배까지 받아 팔았다. 확실히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면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얻곤 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부녀회는 오십 만원이 넘는 돈을 적립하고 있었다. 쌀로 치면 오십 가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부녀회에서 관광이란 걸 가기로 했세요.”

저녁 먹고 바로 부녀회에 다녀 온 아내가 생뚱맞게 그런 말을 꺼냈다.

“관광이라니? 어디 놀러간다는 것이여?”

선택이 묻자 아내는 어딘지 감추는 듯한 기색이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겄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결정을 했구만요. 버스를 한 대 대절해서 속리산 법주사엘 간다고들.”

“그게 무슨 소린가? 집에서 밥하는 아짐씨들이 집을 비우고 놀러를 간다고?”

그나마 배우고 깨어있다는 소리를 듣는 선택으로서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나는 잘 생각해서 집에다 상의를 허자고 했는데 다들 그렇게 밀어붙이는 분위기네유. 그렇게 댕겨온 부녀회가 여럿 있담서.”

선택이 알기로 산동면내에서는 없었다.

“이 사람아, 우리 동네에서 몇 사람이나 거길 가겠소? 다들 어른이 있고 애들도 있는데 끼니는 어떡하고.”
그 말에 아내가 약간 반발하는 말투가 되었다.

“하룻길 댕겨오는 건데 어뜨케 끓여먹어두 밥 한 끼 못 차려 먹느냐고들 하더먼유. 아침은 새벽밥 지어놓구 출발할 거구.”

선택은 끄응, 하고 돌아앉으며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어쩐지 머릿속에서 바가지는 내돌리면 깨진다는 말만 자꾸 맴돌았다. 부녀회다 뭐다 해서 집밖으로 나돌더니 여자들의 간이 커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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