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불①] 등잔불을 켜다

  • 입력 2015.11.15 11:29
  • 수정 2015.11.15 22:5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상락 소설가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도종환의 <등잔>이라는 시의 앞대목이다. 쓸 데 없이(?) 어렵기만한 시들이 난무한 터에, 이 시는 오히려 너무 쉬워서 싱겁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시가 ‘쉽다’고 얘기할 수 있는 독자는 적어도 등잔불을 켜고 생활해본 적이 있는, 나이가 어지간한 축일 것이다. 등잔이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심지는 무엇이며, 그것을 내리고 올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을음은 또 왜 나는지…를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야말로 난해시의 표본이라 할 것이다. 오지랖 넓은 걱정 한 가지 -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을 요즘의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하여 이해시킬까?

저녁, 엄니가 안방으로 밥상을 들고 들어오며 말한다.

“어둡구먼. 불을 조깐 쓰제.”

불을 쓰(켜)는 것은 내 담당이다. 나는 성냥통을 찾아들고 등잔 쪽으로 다가가서 심지에 불을 붙인다. 그런데 붙는가 했더니 이내 꺼져버린다. 아차, 지난밤에 석유가 떨어져서 불이 저절로 꺼졌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나는 광으로 가서 석유가 든 유리병을 들고 와서는 등잔의 뚜껑을 열고 기름을 붓는다. 그것은 언제나 어려운 작업이다. 동생 녀석이 고개를 갸웃한 채 들여다보며 “더, 더, 더, 더…”를 외치다가 “그만!”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기름이 넘쳐서 방바닥이 흥건하다. 아부지와 엄니가 혀를 끌끌 차며 지청구를 날린다. 나는 바닥을 닦으면서 동생 녀석의 머리를 두어 번 쥐어박는다. 어느 집이든 등잔대가 있는 쪽의 방바닥 장판에는 석유 얼룩이 배어있었다.

“너무 어둡다. 심지를 조깐 키와라!”

밝기를 조절하는 일도 내 몫이다. 양철 등잔을 쓸 때에는 창호지를 잘라서 심지를 끼웠기 때문에 뚜껑을 열고 심지를 밀어 올리면 되었지만, 뒷날 사기등잔으로 바뀌면서는 구입할 때부터 실을 여러 가닥 겹친 심지가 아예 박혀서 나왔기 때문에, 그 심지를 돋우려면 바늘이 필요했다. 바늘 끝으로 심지를 파 올리듯 하면 금세 방안이 환해진다. 그러나 너무 키웠다가는 불꽃 끝자락에 그을음이 솟구친다. 그래서 또 어느 집이나 등잔대가 있는 위쪽 천장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럴 땐 바늘로 적당히 찔러 넣어야 한다.

불의 밝기는 식구들이 방안에서 무얼 하느냐에 따라 달라야 한다. 엄니가 바느질을 할 때나 아부지가 무슨 문서를 보아야 할 때는 심지를 넉넉히 돋워야 한다. 아예 뚜껑에 심지가 둘 달려 나온 쌍심지 등잔도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증오감을 드러낼 때 “쌍심지를 켠다”고 하는데 이 역시 등잔에서 나온 말이다.

반대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심지를 최소한으로 낮춰서 기름 소비를 줄인다. 물론 불을 아예 끄고 자기도 하는데, 가령 남녀가 든 방에서 (둘이 어떤 사이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등잔의 불이 꺼졌다’는 것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엄니는 저녁을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작은방에 들러서는 “느그들 불조심해라 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시골 아이들은 대개, 등잔대에 있던 등잔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엎드린 자세로 숙제를 했는데, 그러다보니 아침에 일어나 보면 머리 앞쪽이 그슬려서, 학교에서 동무들로부터 곱슬머리라고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학교가 있는 아랫마을에 구판장이 있었기 때문에 석유를 받아오는 것도 내가 할 일이었다. 어느 날에는 등굣길에 유리 대두병(됫병)을 들고 갔다가 학교가 파한 뒤에 석유 한 되를 받았는데, 집에 오는 길에 그만 넘어져서 박살이 나버렸다. 나는 노끈이 달린 병 모가지만 달랑 들고 귀가하였다. 엄니 아부지는 다치지 않았느냐고 묻기는새로에 비싼 석유를 버렸다고 야단을 쳤다. 그래서 혹시 나는 주워온 자식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뒷날 성인이 되어서 고향에 갔을 때 엄니가 말했다. “너, 국민핵교 졸읍하고 대처로 나간 뒤에 하루도 안 빠지고 밤마다 방문 앞에 등불을 써서 걸어놨니라.”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