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춘길이 삼촌 군대 가던 날

  • 입력 2015.11.07 11:39
  • 수정 2015.11.07 11:4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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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1960년대 중반이면 전쟁이 끝난 지 십년도 더 지난 뒤인데도, 그 무렵 농촌 마을에서 군대 징집영장을 받은 가정은 가히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물론 이때는 군대에 가서 잘 못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평화시’였음에도, 영장을 받아든 사람들은 마치 전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낙담을 했다. 하기야 6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던 우리 동네에만도 6.25 때 무려 넉 장이나 되는 전사 통지서가 날아든 적이 있었으니 그때까지도 군대에 대한 공포를 쉬이 떨치지 못 할만도 했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육군 보병의 머릿수가 곧 국방력’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터라 어지간한 신체 결함쯤은 면제사유로 쳐주지도 않았고, 사지만 멀쩡하다면 가갸 뒷글자도 모르는 문맹자들까지도 가림 없이 갑종(甲種) 판정을 내려서 ‘60만 대군’에 충당하였다. 영장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부모가 연로하거나 혹은 동생들이 너무 어려서 농사일을 혼자서 감당해오던 사람, 그리고 이미 결혼을 해서 어린 자녀를 둔 남자들의 경우 앞길이 더욱 막막했을 터이다.

군대에 가는 사람의 심사가 그처럼 비장하였으므로 동무들이 마련해주는 송별회 또한 요란스러웠다. 사흘 전부터 널찍한 사랑방에 모여서는 돼지를 잡아 추렴을 하고, 밥상의 옻칠이 벗겨질 정도로 젓가락을 두들겨 가며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맨발의 청춘’들이 조용히 모여서 ‘동백 아가씨’도 만나고 ‘황포돛대’에 순풍을 받아 잘 나가다가, 술이 어지간히 취하면 철사 줄에 두 손을 묶인 채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가, 종국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여 ‘전우여 잘 있거라’로 이어졌는데…그쯤에 이르면 서로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런데 우리 집안 친척인 상식이 형은 그처럼 시끄러운 송별잔치를 잘 받아먹고 펑펑 울면서 논산으로 떠났는데, 떠난 지 나흘 만에 머리만 깎인 채로 돌아와 버렸다. 훈련소 입소 전에 다시 한 번 받게 돼 있는 신체검사에서 폐병이 확인되어 면제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상식이 형에게는 잘 된 일이었지만 사흘 동안 이별 잔치를 해준다며 동네를 들었다 놨다 소란을 떨었던 그의 동무들에게는 김이 샐 노릇이었다.

군대에 가는 것이 그처럼 두려웠기 때문에 입영을 피하기 위한 노력 또한 집요하였다. 윤남이네 삼촌은 오른손 검지가 한 마디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내가 윤남이 네 집에 놀러 갔다가 왜 손가락이 그렇게 생겼느냐고 물었다. 그가 태연자약 이렇게 말했다.

“아, 내 손꾸락 말이여? 아, 이거…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는디, 겁나게 큰 고래가 뜬금없이 물속에서 쑥 나오듬만, 징하게 무서운 이빨로 기냥 콱 물어서 짤러 부렀당께.”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군대를 피하려고 자해를 한 것이었다. 나의 당숙뻘이 되는 춘길이 삼촌의 입대 기피 노력 또한 눈물겨웠다. 삼촌은 어느 날 우리 밭에 일을 도와주러 왔다가 신체검사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늘어놓았다.

“첨에는, 말 못 하는 버버리 시늉을 할라고 맘을 묵었제. 그란디 나보담 몬침 검사를 받은 놈들 중에서, 말도 못 하고 듣도 못 한다고 버버리 숭내를 내는 놈들이 일곱 명이나 나오드랑께. 그때 소대장인가 하는 사람이 그 일곱 명을 인솔해갖고 연병장으로 데리고 가서는 ‘느그들은 면제다! 대신에 연병장 열 바쿠를 돌면 집에 보내주께’, 그란 것이여. 그란디 일곱 바쿠째 돌았을 때 그 장교가 나무 뒤에 숨어서 호루라기를 휙 불듬만 ‘제자리 섯!’ 하고 소리를 질른 것이여. 그랑께 일곱 놈이 딱 안 서부렀겄냐. 고놈들 빠따 열 대씩 맞고 갑종 받어부렀어. 그래서 나는 다른 꾀를 냈제.”

춘길이 삼촌이 낸 꾀는,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단단히 구부린 채, 장애자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군의관이 손가락을 억지로 펴려고 하자 아프다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군의관이 웃으면서 “너, 태어날 때부터 손이 이렇게 생겼냐?” 하고 물었는데, 순진한 우리의 춘길이 삼촌은 “(구부리고 있던 손가락을 펴면서)태어날 때는 요렇게 멀쩡했는디, 나중에 사고를 당해서 (다시 구부리며)요렇게 돼부렀단 말이오.” 그랬단다. 그래서 흠씬 얻어맞고 ‘갑종’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촌은 최후까지 군대 기피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입대 전날 우리 집에 와서는 엄니한테 검은 콩을 한 줌만 달라 하였다.

“훈련소에 가서 가심사진(엑스레이)을 찍기 전에 콩 요놈을 억지로 삼키면, 허파에 시꺼먼 구녁이 생긴 것맨치로 되야서, 폐병환자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안 하요.”

그러나 춘길이 삼촌은 일 년 뒤에 씩씩한 군인이 되어서 건빵봉지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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