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장에서 농산물 파는 할아버지를 본적 있나요?

  • 입력 2015.10.25 11:20
  • 수정 2015.10.25 11:21
  • 기자명 구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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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점숙(경남 남해군 삼동면)

오늘은 어머님과 들깨 수확을 했습니다. 들깨 수확 후에는 양파나 심을 수 있을까, 마늘이나 시금치는 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들깨를 털면 가을걷이가 마무리 되어가는 셈입니다. 들깨는 어정쩡하게 남은 논밭의 귀퉁이에 심습니다. 어디에 심어도 잘 자라는 특성 때문이지요. 올해는 들깨가 풍년인가 봅니다. 큰 키를 하고서도 마디마디에 들깨씨가 들어있어서 촐촐 흘러내리는 모양새가 사랑스럽습니다. 들깨를 터는 어머님의 표정이 한없이 밝습니다. 들깨나 참깨, 토란 같은 작물은 주로 어머님의 농사입니다. 파종과 수확을 돕기는 하지만 대부분 당신께서 돌보십니다. 갈무리를 잘 하셔서는 가끔 시간이 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찾는 즈음을 기가 막히게 아시고는 때를 맞춰 인근의 오일장에서 내다팔곤 하십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모셔드리면 시장 한 켠 에서 쪼그리고 앉아 내내 손님을 기다립니다.

시장에는 농산물을 팔러 오시는 농민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대부분 어머님처럼 연배가 있으십니다. 장사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들 중에는 조금 젊은 분들도 계시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가끔 오일장에 물건을 팔려는 분들은 제법 세월의 무게를 아시는 분들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젊은 분들은 팔게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농사를 꼭 필요한 만큼만 정확하게 지을 수 있나요? 하늘이 반 이상을 짓는 농사를 말입니다. 대부분은 먹고 남을 만치 넉넉하게 짓지요. 그럼 할아버지들은요? 글쎄요, 오일장에 농산물 팔러 나오시는 할아버지는 여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뭘까요? 나이든 여성분들이 주로 시장에 농산물을 팔러 가는 까닭이.

농민들의 존엄이 훼손되는 까닭일 테지요. 농사지을 때는 아무리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일을 하더라도 생명을 키워내는 보람이 있지만 시장의 한 모퉁이에서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일은 농민으로서의 품격을 깎아내립니다. 그것은 손님들에게 절대적인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에 못 팔면 다음에 팔아도 되는 물건이면 모르지만 대부분 생물인 까닭에 제 때에 팔지 못하면 헐값에 넘겨야 합니다. 차라리 안 팔면 안 팔지 헐값에 넘기는 일은 자존심이 상해서 싫다는 것이 시장을 멀리하는 이유입니다.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이것은 수 천년이 넘은 거래 방식 아니냐구요? 글쎄 말입니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지요. 세상이 달라지기 전에는 말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농업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불어서 농민들의 삶의 질은 가늠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농가소득이 도시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시대입니다. 그 와중에도 농민들은 소득을 높여내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여전히 단작으로 규모화를 시도합니다. 상품가치가 있는 몇 가지를 뺀 나머지 먹거리는 사먹거나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농업도 살리고 식탁을 살리면서 농민의 자존감을 지켜낼 수 있도록 시장을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농민들이 생산한 어떤 종류의 농산물도 제값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유통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름하여 농민시장, 혹은 직매장의 형태가 되겠지요. 특히 소량 다품종을 생산하는 중소농가에게는 절실한 문제이지요.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식재료 공급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생산자의 품격까지 생각하는 매우 고매한 사업입니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나름 계획된 생산과 판매망으로 거래를 할 수 있으니까요. 직매장의 사례는 다른 나라에도 많고 우리나라에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가계에 보탬이 된다면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헌신과 절박함만으로 농업과 오일장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젊은 시절에는 부끄러워서 장에 나가기가 꺼려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연로한 여성농민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되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야겠지요. 들깨를 털며 상념에 빠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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