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방앗간’이 나락을 담을 때

사진이야기 農寫 본격 수확기 앞둔 정미소의 하루

  • 입력 2015.10.18 21:24
  • 수정 2015.10.18 21:28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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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햇살이 정미소 안으로 쏟아진다. 지게차의 엔진 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 유병록씨와 정미소 직원이 도정기계로 나락을 쏟아붓고 있다.
   
▲ 현창윤씨가 도정된 쌀이 담긴 포대에 자신의 이니셜을 적고 있다.
   
▲ 박중규씨가 정미소 입구에 앉아 20kg 포대를 만들고 있다.
   
▲ 강창원씨가 갓 도정돼 나온 백미를 손에 놓고 확인하고 있다.
   
▲ 유금성씨가 자신의 도정 순서를 기다리며 나락이 담긴 포대를 살펴보고 있다.
   
▲ 도정된 쌀을 실은 트럭이 정미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저 멀리 방장산 능선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산 아래 들녘 나락에 맺힌 이슬이 햇살에 반짝였다. 고창과 영광을 잇는 23번 국도를 쏜살같이 내달리는 차들도 점점 그 수가 늘었다. 간간히 나락이 담긴 톤백을 실은 트럭이 희뿌연 매연을 뿜으며 국도를 오갔다.

지난 13일 이른 아침, 전북 고창군 신림면에 위치한 ‘참방앗간’으로 한 대의 트럭이 전조등을 밝히며 들어왔다. 일주일 전에 수확해 건조시킨 30여 섬의 나락이 적재함에 실려 있었다. 아침 일찍 정미소를 찾은 강창원(83)씨는 정미소 주인인 유병록(40)씨에게 “잘 부탁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유씨는 능숙한 솜씨로 지게차를 움직여 가마니에 든 나락을 정미소 내 도정기계로 옮겼다. 먼지나 이물질을 골라내기 위한 원료정선기 앞엔 이미 다른 직원이 대기중이었다. 지게차로 옮긴 나락을 투입구에 붓는 작업이 이어졌다. 유씨는 직원을 거들며 도정기계의 오작동 여부를 꼼꼼히 체크했다.

나락의 껍질(왕겨)을 벗기고 현미기, 정미기를 거쳐 백미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포장탱크 앞에선 또 다른 직원이 갓 도정되어 나온 백미를 40kg 포대에 담아 트럭 적재함에 차곡차곡 쌓았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강씨는 포대에 담긴 백미를 한 움큼 손에 쥐고 맛을 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식들 나눠 줄 생각에 아침부터 서둘렀다”는 그의 말에 표정의 의미가 묻어났다.

도정기계가 돌아가는 정미소 안은 쉴 새 없이 울리는 기계소음으로 귀가 얼얼했다. 때때로 지게차가 후진하며 울리는 경고음은 감미로운 ‘멜로디’에 가까웠다. 귀 가까이에서 소리를 쳐야만 의사소통이 될 정도였다.

박중규(65)씨는 이런 시끌시끌한 소음에도 아랑곳없이 정미소 입구에서 20kg 포대를 만들고 있었다. 농협 출하 물량을 제외하고는 직거래로 쌀을 판매한다는 박씨는 “택배를 주로 이용하다보니 20kg 포대를 안 쓸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쌀을 일찍 팔기 위해서라도 20kg 포대를 선호한다고 했다.

예전만 해도 동절기나 매년 초 쌀값이 오를 거란 기대심리에 쌀을 보관하기도 했지만 지속되는 쌀값 하락을 경험한 뒤로는 놔두면 곧 손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박씨는 이날 가져온 1.5톤의 나락 대부분을 20kg 포대에 담아 정미소를 나섰다.

점심 이후 ‘그그저께’ 수확한 나락이라며 30여 섬을 갖고 온 유금성(83)씨 또한 쌀값 하락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 쌀값은 “남의 농사짓는 사람은 ‘지푸라기’만 얻어먹는 수준”이라는 것. 한 마지기(200평) 당 30만원 소득이면 다행인 수준에서 임대료, 농약, 비료, 농기계 작업비 등을 빼고 나면 실질 인건비마저도 빠듯한 실정이란다. 오후 들어 나락 수확을 마치고 삼삼오오 정미소로 모여든 농민들은 그와 같은 쌀값 이야기에 수심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올해로 8년째 ‘참방앗간’을 운영 중인 유병록씨 또한 “정미소를 시작할 때 올랐던 도정료가 지금껏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며 “그나마 작년까진 현물(쌀)로 도정료를 받았지만 올해부턴 현금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쌀값 하락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현물로 도정료를 받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정미소 기계마다 ‘도정료 현금으로 받습니다’는 문구가 붙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유씨는 “정미소를 찾는 농민들이 행복하려면 수확의 기쁨만큼이나 쌀값에 대한 확실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본격적인 수확기를 앞두고도 정미소의 기계는 쉴 틈 없이 돌고 돌았다. 다만, 정미소 창고를 가득 채워 층층이 쌓여있을 나락이 아직 보이지 않는 다는 것 뿐. 유씨는 20일을 전후로 해서 정미소도 극성수기에 접어들 것임을 예상했다. 그는 이를 두고 “점심상을 차려도 3~4번은 차려야 될 정도”라고 말하며 웃었다.

햇살이 제법 기울기 시작한 늦은 오후, 정미소에 온 한 농민이 유씨를 찾았다. 다음날 도정 시간을 약속잡기 위해서였다. 유씨가 “아무 때나 편할 때 오시라”고 권하자 농민이 “그럼 (오전) 6시로 하자”고 답했다. 유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결국, 내일도 전조등을 켠 트럭이 ‘참방앗간’의 아침을 깨울 것이다. 당분간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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